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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우리가 몰랐던 DMZ 이야기

Tales of Two Koreas 2022 AUTUMN

우리가 몰랐던 DMZ 이야기 DMZ(Demilitarized zone)는 ‘이야기 창고’다. 그 접경에 사람들이 산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기억을 가진 주민들이 오랜 세월 그곳에 살고 있다. 박한솔(Park Han-sol) 씨는< about dmz > 를 통해 그들의 삶을 기록한다. 우리가 몰랐던 분단의 참모습을 책 안에 생생히 담아낸다. “DMZ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마을엔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어요. 올어바웃은 그 이야기를 기록하고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출발한 회사예요. 다른 지역들을 위한 콘텐츠 사업도 진행하지만, 우리의 시작점인 < about dmz > 를 끝까지 펴낼 생각이에요.” 인생은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뜻밖의 일들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박한솔 씨는 건축사이자 공학박사다.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지만, 지금은 전공에서 더 나아가 물리적 공간에 담긴 비물리적인 이야기를 발굴하는 일을 한다. 한국의 지역들에 집중하는 콘텐츠 기업 ‘올어바웃(All About)’을 꾸리고, 그 첫 프로젝트로 독립잡지< about dmz > 를 만들고 있다. 과거엔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그는 참 행복하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공간을, 누구도 갖지 못한 기억을 하나씩 기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로컬 콘텐츠 기업 올어바웃 박한솔 대표는 독립잡지< about dmz > 를 통해 독특한 문화와 기억을 가진 DMZ 마을과 주민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 곳 “구글에서 DMZ를 검색하면 판문점으로 대표되는 군사 이미지와 훼손되지 않은 자연풍광 이미지가 가장 먼저 나와요. 하지만 그곳엔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자신들만의 독특한 기억을 쌓으면서요. 올어바웃은 그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출발한 회사예요. 다른 지역들을 위한 콘텐츠 사업도 진행하지만, 우리의 시작점인< about dmz > 를 끝까지 펴낼 생각이에요.” 한반도 DMZ(Demilitarized zone)는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산물이다. 1953년 7월 27일 국제연합군•조선인민군•중국인민지원군이 휴전에 합의하면서 설치된 비무장 •비전투 지역을 일컫는다. 지리적으로는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248km의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과 북으로 각 2km 지역을 말한다. 모두 15개의 접경지역이 있고, 그 가운데 세 곳의 이야기가 단행본으로 나왔다. 첫 번째 책인 철원 편( < about dmz >vol.1 : 액티브 철원(Active Cheorwon) > 은 철원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완전히 뒤집는다. 춥고 조용한 지역으로만 인식되던 그 지역엔 다양한 이야깃거리와 풍부한 즐길 거리가 있다. ‘액티브’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그것들을 생생히 담아냈다. 두 번째 책인 파주 편( < about dmz >vol.2 : 릴리브 파주 (Relieve Paju) > 는 접경지와 ‘휴식처’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 파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철새 떼가 쉬어가는 아름다운 습지, 도시인들에게 여유로움을 선사하는 여행 스팟, 과거 미군 부대가 주둔했던 장파리의 상처 등을 두루 담고 있다. ‘편안하다’와 ‘고통을 없애 주다’의 뜻을 모두 가진 ‘릴리브’를 부제로 삼았다. 세 번째 책인 고성 편( < about dmz >Vol.3 : 리바이브 고성(Revive Goseong) > 은 이제 막 출간됐다. 지난 8월 막바지 작업을 마쳤고, 경기도의 접경지역과는 또 다른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연구와 취재를 위해 오랜 시간 DMZ에 드나들었는데도 그에겐 여전히 ‘미지의 공간’이다. 갈수록 궁금하고, 만날수록 흥미롭기 때문이다. “철원 DMZ를 접하고 있는 민북마을의 집은 주소 대신 ‘호수’로 불려요. 1호, 2호, 3호… 이런 식으로요. 민북마을은 유휴지 개간을 위해 민통선(民統線 Civilian Control Line) 북쪽에 건립한 마을들을 말해요. 보통의 집들처럼 주소가 있는데도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군부대의 관리를 받고 있는 탓에 부르기 편하도록 지금도 ‘호수’를 사용하죠. 마을 안에 무기고도 남아 있어요. 점호받거나 군사훈련을 하던 시절도 있었고요. 한국전쟁 이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마을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어요.” 철원역과 내금강역을 잇던 ‘금강산선(金剛山線)’도 철원 민북마을에 흔적이 남아 있다. 금강산선은 1920년대 건립된 전기철도이자 한국 최초의 관광 철도다. 전쟁과 분단이 아니었다면 끊기지 않았을지도 모를 기찻길이다. 철길 옆으로는 일제강점기의 건물이 폐허 상태로 남아 있다. “미디어로 알려진 것과 달리, 막상 그곳의 자연은 그리 광활하지 않아요. 외려 황폐한 느낌이 있어요. 남과 북 양쪽에서 서로를 주시하기 위해 풀과 나무를 베어내거나 일부러 불을 놓아 시야를 확보하거든요. 제가 가장 아름답게 느꼈던 풍경은 두루미 떼의 모습이에요. 철원 민북마을에 겨울마다 두루미들이 몰려오는데 그게 주민들 덕분이더라고요. 벼농사를 많이 짓는 마을 분들이 추후 후 볏단을 묶어서 판매하는 대신, 두루미가 낙곡을 먹을 수 있도록 땅에 그대로 놓아둬요. 사람과 두루미가 동반자인 셈이죠.” 올어바웃은 그 쌀의 이름을 ‘두루미쌀’로 붙이고, 주민들의 쌀 판매를 돕고 있다. 지역 특산물에 주민들의 삶을 담으면서 주민들과 함께 성장해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 그가 DMZ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건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2016년의 일이다. 당시 그의 지도교수가 도시문화기획 ‘리얼 DMZ 프로젝트’의 기획자로 참여하고 있었다. 지도교수를 따라 철원 민북마을을 처음 찾았을 때 그는 주위의 모든 풍경이 마냥 신기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시골을 가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데다, 남자 형제가 없어 군대 문화를 접할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DMZ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가장 보통의 사람,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문득 아쉬웠다. 누군가 만약 DMZ의 속살을 보여줬다면 자신처럼 평범한 사람도 이곳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원에서 ‘DMZ 평화•안보 관광’을 처음 했던 날, 어딜 가든 한국전쟁 당시의 이야기만 들려주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전쟁 이후의 시간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다 민북마을에 갔는데 주민들의 삶 곳곳에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의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제가 기록하고 싶어졌죠.” 지도 교수를 따라 베를린의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The Holocaust Memorial)’을 방문했던 경험도 DMZ 이야기를 잡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희생당한 이들의 일기나 편지 같은 것들, 너무도 평범한 일상의 기록들이 전시실에 있었다. 이어진 전시실엔 아주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집집의 거실에 걸려 있을 법한, 매우 평범한 가족 사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큰 충격에 빠졌다. 사진 앞으로 다가가자 각각의 사람들이 몇 년 뒤에 어떻게 됐는지를 적은 글귀들이 적혀있었다. 희생자로 뭉뚱그려졌던 그들이 우리처럼 평범한 날을 살아가던 한 사람 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 전시가 보여주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DMZ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을 기록하겠다고 그날 결심했다. “운이 좋았어요. 서울대 환경대학원 석•박사 과정 친구들 세 명과 교내 창업경진대회에 응모했다가 덜컥 선정됐거든요. 선정된 10팀 가운데 다른 팀들은 이미 창업을 한 유명회사들이었어요. 우리 같은 초보를 왜 뽑았을까 싶다가도, DMZ의 가치를 인정받은 듯해 기분 좋더라고요. 덕분에 창업이 수월했어요.” 금강산과 북녘땅이 훤히 내다보이는 고성 명파리는 남한 최북단에 위치한 접경 마을이다. ⓒ 올어바웃 아무도 묻지 않았던 것들 2019년에 창업한 올어바웃은< about dmz >발간뿐 아니라 굿즈 제작, 전시 기획, 캠핑장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 중이다. 그 가운데 철원 평화마을에 있는 서울캠핑장은 민통선 안에서 하룻밤 묵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 현재는 서울시의 위탁으로 캠핑장을 운영 중이지만, 언젠가는 ‘DMZ의 기억’을 연구할 수 있는 이들만의 공간을 직접 꾸려 더 많은 이들을 초대할 생각이다. DMZ만이 아니다. 관심 받지 못했던 한국의 지역들을 적절한 콘텐츠로 대중에게 안내하는 것이 올어바웃의 목표다. 현지인의 눈이 아닌 ‘외지인’의 눈으로, 그 지역의 문화와 그 지역 사람들의 기억을 다채롭게 소개하려 한다. “다른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지만, DMZ는 여전히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예요. 취재를 위해 접경지역 주민들을 찾아가면, 거의 모든 분이 따뜻하게 맞아주세요. 철원뿐 아니라 파주나 고성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도 묻지 않았던 이야기를 누군가 궁금해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분들에겐 아주 큰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얼마 전까지 그는< about dmz Vol.3 : 리바이브 고성(Revive Goseong) > 을 출간하기 위해 정신없이 지냈다. 고성도 이야기가 참 많다. 한국에서 가장 긴 바다를 갖고 있으면서도 면적의 70% 이상이 산이라 주민들의 삶이 매우 독특하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고성까지 연결돼 있어, 분단의 아픔을 새삼 느끼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민북마을에서 해제된 명파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고성의 마지막 해변인 명파 해변이 그 마을에 있다. 산도 바다도 이어져 있는데, 땅만 두 동강으로 나뉜 셈이다. “고성 편의 타이틀을 ‘리바이브’라 붙인 건 그 지역에 대형 산불이 잇달아 일어났기 때문이에요. 아픔을 딛고 다시 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을 제목에 담았어요. 그리고 코로나19로 비대면 여행지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여행자들 사이에서 고성이 인기 있는 장소로 떠오르기 시작한 점도 리바이브와 연결된다 생각했고요.”기록으로 기억을 살려내는 그가 한 지역이 살아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철원 민북마을 유곡리의 폐교를 마을 주민과 함께 캠핑장으로 새롭게 공간을 조성하여 함께 운영하고 있다. ⓒ 올어바웃 < < about dmz >Vol.3 : 리바이브 고성(Revive Goseong) > 에 실린 ‘금강산의 흔적을 찾아서’기사. 금강산 마지막 봉우리가 있는 고성에서 찾은 한국인의 그리운 공간, 금강산의 흔적 등의 이야기를 담았다. ⓒ 올어바웃 박미경(Park Mi-kyeong 朴美京) 자유기고가(Freelance Writer)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사진가(Photographer)

탈북민의 오늘을 기록하는 영화

Tales of Two Koreas 2022 SUMMER

탈북민의 오늘을 기록하는 영화 2000년대 초반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윤재호(尹载皓, Yun Je-ho [프랑스 Jero Yun]) 감독은 전형성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오늘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조명하려고 한다. 그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동시에 작업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윤재호 감독은 그의 영화를 통해 경계에 선 사람들, 그중에서도 탈북민의 삶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윤재호 감독은 2021년 한 해에만 극영화 와 다큐멘터리 두 편의 장편 영화를 개봉시켰다. 는 탈북민들을 위한 정착 지원 시설 하나원(Hanawon)을 이제 막 퇴소하고 체육관 청소로 돈을 벌게 된 여성 진아(Jin-a, 吉娜)의 이야기이다. 에는 지금은 북한 땅인 황해도 출신 가수이자 KBS TV의 장수 오디션 프로그램 의 MC 송해(Song Hae, 宋海)가 등장한다. 영화가 보여 주는 건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속내이다. 진아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한국에 정착하고자 복싱 스텝을 밟기 시작하고, 송해는 과거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초상을 솔직하게 꺼내 보인다. 탈북민의 삶 윤 감독은 경계에 선 사람들, 그중에서도 탈북민의 삶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보며 영화를 만들어 왔다. 그의 영화는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담담하게 그 실체를 목격한다.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들도 이러한 그의 영화들을 주목했다. 우선 그는 헤어진 아들을 만날 희망을 품고 사는 조선족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2010)으로 2011년 제9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Asiana International Short Film Festival)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생계를 위해 중국으로 간 북한 여성의 삶을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 (2016)로 제38회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Moscow International Film Festival) 베스트 다큐멘터리상(The Best Film of the Documentary)과 제12회 취리히 영화제(Zurich Film Festival) 국제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배우 이나영(Lee Na-young, 李奈映)이 주연한 윤재호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 (2017)와도 연결된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개막작으로 상영된 이 작품은 조선족 대학생 젠첸(Zhenchen, 镇镇)이 바라보는 탈북민 어머니 이야기다. 이후에도 감독은 단편 (2016)로 제69회 칸 국제 영화제 감독주간(The Directors’ Fortnight), 로 제7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Berl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제너레이션 부문에 초청받아 세계 영화인들에게 분단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개했다. 유학 생활 윤 감독이 영화로 대중과 소통을 시도한 건 프랑스 유학 시절이었다. 익숙한 동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20대 초반 친구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20여 년 전인데도 아직까지 출국 날짜를 기억한다. 2001년 9월 12일, 9·11 테러 다음 날이었다. 미국행 항공편이 모두 멈춘 공항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세상의 혼란을 피부로 느낀 그가 향한 곳은 프랑스 북동부의 작은 마을 낭시다. 그곳에서 어학 연수와 여행을 병행하다 돌연 예술 학교 시험을 봤다. 한국에서 공부했던 미술 실력을 발휘해 실기 시험을 통과한 그는 계획에 없던 유학생이 되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재밌었어요.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예술 학교에서 그림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 등을 배우면서 시야를 넓혔다.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의 교류도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윤 감독을 영화의 세계로 안내한 것도 DVD 100개가 든 박스를 통째로 빌려준 벨기에 친구였다. 상자 안에는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임마르 베리만, 오손 웰즈 등의 1950~1960년대 클래식 영화가 빼곡했다. 때리고 부수는 영화만 보던 20대 청년이 지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접하게 된 것이다. “100편을 보고 또 봤어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었어요.” 그는 무엇보다 영화는 혼자서 만들 수 없는 작업이라는 점에 반했다고 말했다. 여러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었던 그는 함께 할 친구들을 모았고, 대화를 시작했다. 는 생계를 위해 중국으로 간 북한 여성의 삶을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 CINESOPA 조선족 대학생 젠첸(Zhenchen)이 바라보는 탈북민 어머니 이야기를 다룬 는 윤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다 © peppermint&company 는 탈북민들을 위한 정착 지원 시설에서 막 퇴소하고 체육관 청소로 돈을 벌게 된 진아(Jin-a)의 이야기이다. © INDIESTORY 오늘의 일상 2004년 친구들과 제작한 첫 영화는 프랑스에서 살아가는 한국 여성이 이방인으로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이야기였다. 그의 자전적인 질문들이 포함된 작품이었다. ‘나는 왜 여기에 살고 있을까? 왜 거기가 아닌 여기일까?’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던 물음을 영화에 담았다. 부산에서 낭시로 온 청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영화에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을 초대했다. 탈북민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윤 감독이 경계에 선 캐릭터를 창조할 때 가장 깊이 고민하는 건 그들의 시간이다. 거기에서 여기로 온 인물이 어떤 과거를 경험했는지 골몰하고, 그것이 어떻게 그들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핀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지만 오늘은 결국 어제가 되죠.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일의 내가 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인물의 과거 이야기를 배제하는 편이고 미래에도 집착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저 오늘 그들이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 보여 주고 싶어요. 오늘의 내가 바뀌면 내일의 나는 분명히 바뀌니까요. 그것이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예요.” 이 원칙은 그가 병행 중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 양쪽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는 를 찍는 3년간 마담 B의 출입국 경로에 동행했고, 첫 촬영 날에는 네 시간 넘게 송해와 인터뷰를 했다. 일상의 순간들을 관찰하며 얻는 사소한 느낌들을 영화에 담고자 한 것이다. ‘탈북민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한국에서 무엇을 느끼며 살까?’ 감독과 배우들은 묻고 또 물었다. 자신이 했던 경험을 엮어 보기도 하고, 실제로 북한을 떠나온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피하려고 한 건 미디어에 나오는 천편일률적인 탈북민의 이미지였다. 영화 는 한국 최고령 연예인으로서의 송해가 아닌 무대 뒤에 숨겨진 그의 인생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룬다. 해답보다 질문 윤재호 감독은 관객에게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든다. 실제로 뚜렷한 결말을 내리기보다 인물 앞에 주어진 가능성을 비추며 막을 내리곤 한다. 에 등장하는 모자의 희망이 현실이 될 수 있을지, 의 진아가 복싱 경기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관객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귀띔한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게 경계 위에서 존엄해진다. “행복의 정의는 개인마다 다르잖아요. 영화 속 인물들에게 최대한 열려 있는 마지막을 주려고 해요. 그래야 관객도 탈북민이 한국에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지 않을까요?” 영화를 본 실제 탈북민들은 어떤 반응일까? 사실적인 묘사에 민망했다는 이도 있었고,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줘서 반갑다는 이도 있었다. 오래전 겪었던 시간을 스크린을 통해 다시 본 이들의 의견은 각양각색이었다. 인권 단체의 활동가들, 분단 현실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각자의 배경 지식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영화를 바라봤다. 북한과 남한이라는 특정 국가의 이야기 안에서 보편적인 경험을 찾아내고 공감했다는 외국인 관객들도 있었다. “제가 만든 작품이 한 명에게라도 가치 있었으면 해요. 그 한 명이 어디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니까요.” 자신을 포함한 한 명 한 명의 영향력을 믿으며 영화를 만드는 중인 그에게 20년 가깝게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 묻자 그는 ‘사랑’이라고 답했다. “전쟁이든, 분단이든,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면 분명 그곳에 사랑이 결핍돼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을 추구하기에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바깥에서 이루고픈 꿈이 있는지 물었다. “아주 먼 미래가 될지도 모르지만 버스 한 대를 타고 부산에서 출발해 평양과 함경북도를 거쳐 러시아를 횡단 후, 독일과 파리로 여행하고 싶어요. 그게 유일한 바람입니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윤재호 감독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로드 무비를 찍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영화도, 분단된 한국도, 열린 결말에 놓여 있기에 그 작품이 기대된다.

고립과 자유, 세상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Tales of Two Koreas 2022 SPRING

고립과 자유, 세상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 이름과 실제가 정반대인 비무장지대(DMZ)는 군사분계선 기준 남북 양방향 각 2km 폭으로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고 있는‘모순의 땅’ 이다. 남측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한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역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 두 예술가에 의해 묵직한 시대적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으로 재해석되어 주목을 끌었다. 한국 작가들에게 ‘분단’은 피하고 싶은 주제일 수도 있다. 너무 뻔하거나, 혹은 너무 거창하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국가의 시민이라는 태생적 조건을 예술 작업으로 끌어왔을 때 딜레마에 빠지기도 쉽다. 다른 나라 작가들이 말하기 힘든 주제인 만큼 해외에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목하지만, 국내에선 “쉬운 길을 택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분단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경원(Moon Kyung-won 文敬媛) 과 전준호(Jeon Joon-ho 全浚晧)는 이 양날의 검을 호기롭고 영리하게 빼 들었다. 2021년 9월 3일 시작해 2022년 2월 2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문경원·전준호 – 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MMCA Hyundai Motor Series 2021: News from Nowhere – Freedom Village) 전시에서 이들은 분단이라는 이슈를 홈그라운드에 과감히 펼쳐 보였다. 두 작가는 한국 미술계에서 보기 드문 아티스트 듀오다. 이들은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데 이화여대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문경원은 서울에서, 전준호는 고향이자 작업 기반인 부산의 영도에서 각자의 개인 작업과 공동 프로젝트를 병행한다. 두 사람이 처음 의기투합한 2009년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 역사의 수레바퀴에 가려 희생된 개인, 기후 변화 등 여러 사회 담론과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며 예술의 역할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 왔다. 두 작가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돼 전시를 선보이면서 국제 무대에 데뷔했다. 문경원(왼쪽)과 전준호 작가가 자신들이 협업한 이 전시되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포즈를 취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로 채택된 이 작품은 영상, 설치, 아카이브, 사진, 대형 회화 그리고 연계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모바일 플랫폼으로 구성되었다. 비무장지대(DMZ) 안 대성동 마을을 주제로 하여“인류의 대립과 갈등으로 탄생한 기형적 세계를 조망하고, 팬데믹으로 단절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현재를 성찰했다”고 작가들은 설명한다. 미래에서 관찰한 현재 이번 전시 제목인 ‘미지에서 온 소식’은 이들이 공동으로 펼쳐온 장기 프로젝트이자, 다른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벌이는 협업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을 통해 두 작가는 영상, 설치, 아카이브, 출판물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는 통섭의 연작 전시를 진행해 왔다. 전시 제목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이끈 사상가이자 시인, 소설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가 1890년 쓴 동명 소설에서 따왔다. 그는 꿈에서 200여 년 후의 런던을 닷새간 여행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당대의 현실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문경원과 전준호는 이 소설에서 제목뿐만 아니라 미래에 시선을 던져 놓고 그 시점에서 현재를 깊숙이 관찰하는 형식 또한 빌려왔다. 두 작가는 “우리의 미래 지향적인 설정은 미래를 진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아젠다를 논의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 독일 카셀 지역에서 열린 5년제 현대 미술 미술 행사 ‘도쿠멘타(documenta 13)’에서 ‘세상의 저편’(The End of the World) 라는 부제로 처음 선보인 이 작품으로 두 작가는 그해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2’ 최종 수상 작가로 선정됐다. 이후 미국 시카고 예술대학 설리번 갤러리(2013), 스위스 미그로스 현대미술관(2015), 영국 테이트 리버풀(2018) 등 여러 도시에서 각기 다른 부제로 전시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2021년 초 두 사람이 ‘MMCA 현대차 시리즈 2021’ 작가로 선정되면서 마침내 이 작품이 한국에서 대규모로 펼쳐지게 됐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자동차의 후원으로 2014년부터 매년 한국을 대표하는 중진 작가한 사람을 초청해 개인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2020년 양혜규에 이어 문경원·전준호 작가는 여덟 번째 주인공이 됐다. “이 프로젝트는 국가와 도시를 옮겨 다닐 때마다 그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 현안을 담아 왔어요. 한국이 무대가 되니 고민이 커졌습니다. 분단국가라는 클리셰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그것은 한국 작가라면 꼭 다뤄야 하는 사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만 머물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역사를 끌어내는 체험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분단을 주제로 다루게 된 배경을 전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2021, 2채널 HD 영상설치, 컬러, 사운드, 14분 35초.서로 등을 맞댄 대형 화면 2개가 각기 다른 영상을 보여준다. 작품은 전시공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영상의 흐름에 따라 조명이 점멸하거나 음향이 흘러나오는 등의 연출이 관람객의 몰입을 돕는다. 화면 속 자유를 갈망하는 남자 A(배우 박정민)가 산을 다니며 채집할 자생 식물을 찾고 있다. 갈등이 만든 기형적 공간 작품의 배경으로 선택한 곳은 남측 비무장지대(DMZ)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인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었다. 한국의 마을 이름은 대부분 지형이나 그 마을에 깃든 전설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마을은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A는 바깥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대신, 식물을 채집해서 연구하고 표본을 만든다. 이 표본에 풍선을 달아 하늘로 날려보내면 반대편 화면의 ‘B’가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바깥 세상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비게이션에서조차 표시되지 않는 이 마을은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로 70년 가까이 바깥 세계와 단절된 채 시간이 멈춰 있는 곳이다. 1951년 시작된 정전 회담에서 남측의 대성동 마을과 북측의 기정동 마을은 각각 DMZ 내 위치한 양측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로 남도록 인정받았다. 이후 대성동은 ‘자유의 마을’, 기정동은 ‘평화의 마을’이란 이름으로 냉전시대 남북한 사이 치열한 체제 경쟁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무대가 되었다. 대성동엔 현재 49가구 약 200명이 살고 있다. 한국 영토 안에 있지만 한국 정부가 아닌 UN의 통제를 받으며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 마을 여성이 외부 남자와 결혼하면 마을을 떠나야 하지만, 외부 여성이 이 마을 남자와 결혼하면 거주권이 인정된다.두 작가는 이 마을을 한반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이 빚어낸 독특한 장소로 한정하지 않고, 인류사 전반에서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탄생한 기형적 세계를 상징하는 곳으로 확장한다. “처음에는 좀 더 우리의 정체성이 담긴 도시를 배경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대성동‘자유의 마을’은 우리 자신에게조차 너무 비현실적인 공간이었기에 예술의 키워드가 될 수 있었습니다.”문 작가의 말에 전 작가가 동의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어쩌면 이 마을 사람들은 현재 팬데믹 상황에 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재난적 상황에서 고립되어 70년을 살아왔습니다. 인류가 바이러스와 2년 넘게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 이 마을의 고립은 평소와 달리 보편적인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키워드인 동시에 우리의 삶을 성찰하기 좋은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 전시는 영상, 설치, 아카이브, 사진, 대형 회화 그리고 연계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모바일 플랫폼으로 구성됐다. 전시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서로 등을 마주한 두 개의 대형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이다. 한쪽 면에선 영화배우 박정민(朴正民)이 서른두 살의 남성 A로 등장한다. A는 자유의 마을에서 태어나 한 번도 바깥세상에 나간 본 적이 없는 인물로, 비무장지대에 자생하는 식물을 연구하는 아마추어 식물학자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외부 세계에 알리고 싶어 연구한 내용으로 식물도감을 만든 뒤 비닐 풍선에 넣어 날려 보낸다. 풍선은 시공을 뛰어넘어 반대편 스크린 속 20대 초반의 남자 B에게 전달된다. 아이돌 그룹 갓세븐 멤버 진영(珍荣)이 연기하는 B 역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평생 감옥처럼 좁은 공간에 갇혀 살고 있다. 우주선을 닮은 공간에 고립된 B의 유일한 낙은 가끔 창밖을 내다보는 것뿐이다. 어느 날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 풍선은 B의 일상을 뒤흔든다. 깊은 혼란에 빠져 며칠 동안 그저 쳐다보기만 하던 B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내용물을 꺼내 본다. 이후 B는 계속 A로부터 풍선을 받는다. 무한대의 타임 루프처럼 A와 B의 이야기가 순환된다. 이 영상들을 지나면 자유의 마을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다. 작가들이 국가기록원에서 사용 허가를 받은 이미지를 포토샵으로 가공했다. 문 작가는 사진들을 바라보며 작업을 회상했다. “이미지 사용 허가는 받았지만 사진 속 인물들의 익명성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거나 여러 이미지를 조합해 만든 전혀 다른 얼굴을 입히기도 했어요. 또는 포토샵으로 사진 속 인물들에게 마스크를 씌우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지금의 팬데믹 상황을 상징이라도 하는 듯, 절묘한 결과물이 나왔지요.” 이 곳을 지나 마지막 전시실로 가면, A가 식물을 찾아 헤매던 눈 덮인 숲이 거대한 캔버스 위에 펼쳐진다. 문 작가가 6개월에 걸쳐 완성한 가로 4.25m 세로 2.92m 대형 풍경화다. 얼핏 보기에 사진처럼 보일 만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이 그림은 스크린과 현실을 이어주며 가상과 실재가 뒤섞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전시장 밖 오픈 스페이스인 서울 박스에 설치된 모바일 아고라는 이 프로젝트의 지향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고대 그리스 시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던 광장 아고라의 개념을 현대적으로 확장해 다양한 분야의 다중 지성들이 모여 대담을 나누면서 연대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이번 전시에선 접으면 컨테이너 박스 형태가 되는 이동식 철 구조물로 제작됐다. 이곳에서 전시 기간 중 매달 한 차례 열린 대담에 배우 박정민을 비롯해 건축가 유현준(兪炫準), 생태학자 최재천(崔在天), 뇌과학자 정재승(鄭在勝) 등이 참여했다. 전시장을 나서기 직전 관객은 벽면에 적힌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의 말을 만났다. “풍경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고투와 성취와 사건들을 가리는 커튼처럼 느껴진다. 커튼에 가려진 이들에게 두드러진 지표는 그저 지리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기적이고 개인적이기도 하다(Sometimes a landscape seems to be less a setting for the life of its inhabitants than a curtain behind which their struggles, achievements and accidents take place. For those who are behind the curtain, landmarks are no longer only geographic but also biographical and personal).”전쟁의 끝에 70년간 고립되어 살아온 한 마을의 비극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자, 2022년 팬데믹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두 작가가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였다. 전시장 옆 야외에 설치되었던 ‘모바일 아고라’는 조립과 변동, 이동이 가능한 큐브형 스테인리스 스틸 설치 구조물이다. 각 196 x 259 x 320 cm. 이 곳에서 전시 기간 중 매달 한 번씩 건축, 과학, 디자인, 인문학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문경원 작가가 6개월에 걸쳐 완성한 대형 회화 ‘풍경’이 영상에서 남자 ‘A’가 헤매던 어느 산속 배경을 재현했다.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유채, 292 x 425cm. 영상의 배경은 국가기록원이 제공한 자유의 마을 사진과 비슷한 풍경을 지닌 DMZ에 접경한 경기도 파주의 어느 지역이다.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Tales of Two Koreas 2021 WINTER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 남북한 주민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는 ‘사부작’은 대학생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이다. 익명으로 출연하는 라디오 방송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탈북민 게스트들의 경계심을 낮추어 보다 솔직한 대화로 남한 사회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실 저는 북한에서 왔어요.”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이 이 말을 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남한 사회에는 아직 대한 편견과 차별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북한이탈주민 신변보호제도 개선방안 실태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0% 이상이 ‘탈북민이라는 신분이 노출됐을 때 남한 주민이 경계심을 보이거나, 차별적으로 대하는 경험을 했다’고 답했다. ‘사부작’은 이런 편견과 차별을 깨기 위해 3년 전 남한의 대학생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라디오 방송이다. 이 흔치 않은 방송 이름은 ‘사이좋게 북한친구와 함께 만드는 작은 수다’를 의미하는 한국어의 줄임말이다. 사부작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게스트가 익명을 원하지만, 간혹 신분이나 얼굴을 공개하기도 한다.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박예영 이사장은 ‘김책 털게’라는 닉네임으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3부로 나뉘어 출연했다. 왼쪽부터 사부작 스탭 박세아, 안혜수, 게스트 박예영 이사장. © 사부작 재미있는 닉네임 북한 출신 게스트를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 팟캐스트 방송은 탈북민들의 삶을 ‘조미료 섞지 않고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이 모토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남북한 주민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목표다. “나 북한에서 왔어”라고 말하면 “그래? 난 대구에서 왔는데”라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이 방송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 걱정 때문에 미디어 노출을 꺼리는 출연자들에게 별명을 만들어준다. 이를테면 ‘경성 송이버섯’, ‘혜산 감자밥’같은 이름인데, 전자는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 고향의 송이 버섯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이고, 후자는 감자밥을 즐겨 먹었던 양강도 혜산 출신이라는 뜻이다. 진행자 역시 ‘부산 돼지국밥’처럼 자신의 출신 지역과 좋아하는 음식의 이름을 붙여 만든 닉네임을 사용한다. 이는 게스트가 자신의 고향을 자연스럽게 밝히면서 보다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 이 같은 배려는 게스트 섭외에도 도움이 된다. 탈북민들은 대부분 출연 전에는 자신의 고향을 밝히길 꺼리지만,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어느 덧 고향을 떠올리며 행복해한다. 뿐만 아니라 출연을 계기로 남한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자신감을 얻고, 이후 자연스럽게 출신 배경을 밝힐 수 있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녹음이 끝나면 게스트들이 ‘지금까지 북한에서의 기억을 잊고 부정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오늘 이야기하며 그 시절의 나를 좀 더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씀하세요. 그럴 때면 우리 방송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해집니다.”스태프 박세아(朴細我) 씨의 말이다. 그는 연세대 교육학과 3학년 학생으로 고등학생 시절 탈북민 자녀를 멘토링한 이후 탈북민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가 이 방송에 지원하게 됐다. 이 방송의 또 다른 목적은 개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게스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사회의 조명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더 나아가 북한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것이다. 대화의 주제는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때때로 게스트가 원할 경우 가볍게 다루기도 한다. 이 방송을 처음 시작한 것은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이던 박병선(朴炳宣) 씨다. 그는 현재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방송 활동을 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탈북민들의 얘기를 팟캐스트로 들려주면 남한 사람들이 이들을 친숙하게 대할 수 있게 되고 서로 거리를 느끼지 않고 어울려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탈북민들이 차별과 편견을 받는 것을 알고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들의 얘기를 가감없이 진솔하게 들려주는 방송을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사부작’은 인액터스(Enactus) 소속 연세대 동아리 프로젝트 ‘지음’(知音)이 다섯 달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8년 8월에 첫 방송을 내보냈다. 인액터스는 1975년 미국 리더십 연구소(National Leadership Institute)가 설립한 글로벌 비영리단체이고, ‘지음’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2020년 8월부터 참여 범위를 넓혀서 현재는 연세대뿐 아니라 가톨릭대, 서강대, 서울대, 성신여대, 이화여대, 중앙대생들이 함께하는 대학생 연합동아리로 운영한다. 이 팟캐스트 방송은 탈북민들의 삶을 ‘조미료 섞지 않고 담백하게’ 들려주는 것이 모토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남북한 주민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특별한 게스트들 현재 스태프는 총 9명으로 3명씩 팀을 이뤄 번갈아 방송을 진행한다. 팀원은 역할 구분 없이 섭외, MC, 편집, PD 업무 등을 두루 맡고, 녹음은 홍대 부근에 있는 ‘스튜디오 봄볕’에서 한다. 방학을 제외하고 거의 매주 한 명씩 게스트를 초청해서 팟캐스트를 제작하는데, 한 게스트의 얘기를 3회로 나눠 편집해 올린다. 첫날 방송에서는 고향 음식·북한에서의 삶, 둘째 날은 탈북 과정, 셋째 날은 남한 정착기와 생활 얘기를 듣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탈북민들의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를 전하는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우리 공동체 이야기’를 전하고자 노력한다. 게스트가 정해지면 사전 인터뷰로 방송 흐름을 미리 설계하지만, 원고를 준비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위해 온라인 화상 채팅을 통해 게스트와 미리 친해지는 기간을 갖기도 한다. 초기 게스트는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제작진과 동년배로 섭외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게스트가 지인들에게 출연을 권하고 입소문도 나면서 다양한 연령층의 출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중 한 사업가 출연자가 스태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북한에서 15살 때부터 탈북 브로커 활동을 하다가 국가보위부의 전국수배를 받게 된 인물이었는데, 얼굴이 안 보이는 팟캐스트의 특성상 흥미로운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또 다른 인상적인 게스트는 고등학생이던 ‘길주 완자’다. 풍계리 핵실험장이 있는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나고 자란 그는 14살 때인 2013년 북한을 탈출해 이듬해 한국에 들어왔다. 드물지만 실명을 밝히고 출연한 게스트들도 있었다. 북한 여군장교 출신 김정아(함경북도 청진 출신) 씨가 첫 번째 경우였다. 그는 양부모와의 갈등 끝에 꽃제비(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북한 어린아이를 지칭하는 말)로 지내다가 숨진 오빠 얘기를 하면서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유럽에서 외화벌이 해외파견 근로자로 일하다가 한국에 입국한 나민희 씨도 드문 일화를 지닌 게스트였다. 그는 출신 성분이 아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했던 평양 상류층 자녀였다. 서울에 정착해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는 주성하 씨가 출연한 적도 있다. ‘김책 털게’라는 별명과 함께 실명을 밝힌 박예영 통일코리아협동조합 대표도 특별한 게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작진의 일원인 안혜수(安慧洙) 씨는 “박 대표가 남한 대학생들이 한민족과 통일에 관심을 갖고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것이 너무나 고맙다고 말해줘서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북한 황해도 출신인 안 씨는 성신여대 법학부 4학년 학생으로 이 방송의 소문을 듣고 팀원으로 자원했다. 2019년 9월에 시작된 시즌 3부터는 탈북민 출신 학생들도 스태프로 참여하고 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재학중인 안성혁(安成奕) 씨와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2학년 학생인 박범활(朴汎豁) 씨의 경우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다가 부모님과 함께 탈북해 2011년 12월 한국에 들어온 안 씨는 현재 이 방송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친구가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하여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게스트들이 바쁜 일상 때문에 떠나온 고향 생각을 자주 못 하는데, 우리 방송에 출연해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말할 때 가장 뿌듯해요.” 대학생들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라디오 방송 사부작은 북한이탈주민들 각자의 삶에 담긴 특별한 이야기들을 자극적으로 과장하거나 획일화 시키지 않고 진솔하게 소개하려 노력한다. 주로 사전 녹음 방송을 하는데, 녹음은 홍대 부근의 ‘스튜디어 봄볕’에서 한다. 왼쪽부터 사부작 스탭 안성혁, 안혜수, 박세아. 생각의 변화를 위하여 2021년 8월부터는 시즌 7이 진행되고 있다. 시즌은 대학의 한 학기 기준이다. 우양재단, 남북통합문화센터, 연세대 고등교육혁신원 등의 기관으로부터 녹음실 대여비나 공개방송비용 등을 지원받고 있는데 그동안은 게스트에게 출연료를 주지 못했지만, 지원 덕분에 최근 들어 작은 액수의 사례비도 줄 수 있게 됐다. 탈북민들 사이에서 친숙하게 자리를 잡은 이 팟캐스트는 2021년 9월 기준으로 누적 조회 수가 20만 명에 이른다. 청취자들은 댓글로 피드백을 주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보내기도 한다. 많은 격려와 응원 덕분에 대가 없이 봉사하는 제작진이 열정과 용기를 얻는다. 이 팟캐스트 방송의 가장 중요한 소통 창구는 댓글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매주 방송내용을 정리한 카드뉴스를 올리기도 한다. © 사부작 ‘사부작’은 지금까지 130여 명의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눴다. 2021년 2월에는시즌 1과 시즌 2 게스트 중에서 12명의 이야기를 골라 담은 에세이집 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탈북 계기, 탈북 이후 남한 정착 과정, 이후 어려웠던 이야기가 담겼다. 책을 통해 그동안 정형화되었던 북한에 대한 정보 외에도 북한사람들의 실제 정서, 문화와 먹거리, 탈북민들의 고민, 북한에서의 다양한 추억과 세시풍속, 한국과 비슷하면서 다른 점들을 보다 깊이 파악할 수 있다. ‘사부작’ 제작진은 게스트들과 대화를 나누며 남한 사람들이 탈북민을 일반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자신들 마저도 처음에는 ‘탈북민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지내겠지’, ‘그들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반면, 게스트들은 진행자들을 남한 사람이라고 일반화하지 않았다. 각자 개성과 특징을 지닌 개인으로 보았다. 제작진은 오히려 자신들이 다양한 게스트를 만나며 서서히 변화했고, 지금은 탈북민을 특정한 이미지가 아닌 개인으로서 표현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학교에서 남북통일에 관한 토론 수업을 할 때면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죠. 젊은 세대가 서로를 적이라고 부를 때 가장 가슴이 아파요. 우리 방송이 남북한 주민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더 오래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안성혁 대표의 말이다. 에세이집 에는 이색적인 북한음식이 삽화를 곁들인 레시피로 소개되는데, 책 속 12명의 게스트들은 각자 고향의 음식들을 소개하며 이와 관련된 경험, 추억을 이야기한다 © 프로젝트 지음

젊은 영국 여성이 바라본 북한

Tales of Two Koreas 2021 AUTUMN

젊은 영국 여성이 바라본 북한 외교관 남편을 따라 2년간 북한 평양에 둥지를 틀었던 영국 여성. 사회주의 체제 이면의 곳곳에서 보고 느낀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그들과 나누었던 다정한 교감은 귀국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에 살아 움직인다. 30대 영국 여성이 경험한 북한은 생각보다 다정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평양 생활은 2년 남짓은 그의 가치관을 크게 바꿔 놓기에 짧지 않았다. 외교관 남편과 함께 평양에서 2년 머물고 영국으로 돌아온 린지 밀러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상 불가능했던 북한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책을 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유를 당연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 Lindsey Miller 작곡가이자 음악 감독인 린지 밀러(33·Lindsey Miller)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외교관 배우자와 북한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묶어 지난 5월 책으로 펴냈다. 200쪽의 이 책 제목부터 범상하지 않다. (North Korea: Like Nowhere Else). 북한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는 그곳 사람들이 마치 차가운 로봇 같을 것이라 예상했다.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더없이 냉담하거나 적대적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평양에서 2년을 살다 돌아온 지금, 그런 생각은 편견이었다고 밀러는 말한다. 그가 만난 북한 주민들은 우호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외국인들은 흔히 열병식이나 집단체조, 미사일 같은 선입관을 가지고 북한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도 매우 엄하고 딱딱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손주를 귀여워하고, 가족은 서로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죠.” 평양 주변은 물론 시골길에서도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가는 군용 트럭 뒤에 빼곡히 앉은 군인들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밀러가 본 군인은 딱딱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닌 그저 미소를 짓고 인사도 건네는 젊은이들이었다. ⓒ Lindsey Miller 그들은 군인이기에 앞서 평범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군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들 중 한 명은 밀러에게 손 키스를 보냈다. 확실한 변화 밀러는 북한 사회의 획일화된 분위기 속에서 작은 변화를 발견했다. 어느 날 오후, 단속과 제재를 상징하는 로동신문사 앞을 손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광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책에 담았다. 그뿐 아니라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어린 학생들은 미국 디즈니사의 캐릭터들이 그려진 가방을 메고 다니기도 했다. “미국 문화의 상징인 디즈니 가방을 북한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북한 국영 텔레비전에서도 디즈니 만화영화를 봤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저는 북한 주민들이 그런 것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아는지 궁금했습니다.” 밀러는 자신이 찍은 수천 장의 사진 중 트럭을 타고 가는 북한 군인들 사진을 가장 좋아한다. 이 사진에는 그가 북한과 그곳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는지 잘 표현돼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군인이라 하면 김정은 정권을 떠올리지만, 밀러가 보고 느낀 그들은 군인이기에 앞서 평범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는 이 사진을 찍은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군인들과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들 중 한 명은 밀러에게 손 키스를 보냈다. 다들 웃기 시작했다. 밀러도 똑같이 손 키스를 보냈다. “우리는 북한에 이런 일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군복에 너무 집중해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것을 잊곤 하죠. 저는 북한에 살면서 그들이 누군지, 어디서 왔고, 가족과 그들의 인생은 어떨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주민들과의 접촉 외국인 거주자들은 꽤 자유롭게 평양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쇼핑을 하거나 외식을 하고, 거리에서 마주친 주민들과 비교적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놀랍게도 많은 북한 주민들이 기본적인 영어 회화를 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영어를 하려고 먼저 다가오기도 했다. 반면 관광객들과는 달리 외국인 거주자가 지켜야 하는 규칙과 제약도 있었다. 버스나 택시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고 북한 주민의 집 방문도 불가능했다. 북한 주민들과 항상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감시 체계를 많이 경험했다. 길에서 만나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한순간 표정을 바꾸고 갑자기 자리를 뜰 때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영락없이 양복 입은 남자가 서 있곤 했다. 평양 시내의 상점들 역시 이방인을 선뜻 반기지는 않았다. 가끔 가게안에 여러 손님이 있는데도 밀러가 들어오면“영업이 끝났다”고 하기도 했다. 밀러가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대상은 평양의 젊은 여성이었다. 특히 또래 여성들에게 관심이 갔다. 연애와 결혼, 커리어에 대한 그들의 사고 방식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제가 만난 평양의 젊은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보다는 일과 커리어를 더 중시했어요. 제가 결혼을 했는데도 왜 아이가 없을까 매우 궁금해했습니다. 장시간 일하는 게 너무 피곤하다는 얘기를 한 여성도 있었죠. 결혼하기 싫다는 여학생도 있었어요. 물론 평양의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경우들이었죠. 제가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북한 사회의 상위 권력 계층이었고 외부인들과 접촉도 많이 경험해본 상태였어요.” 그는 외교단지가 있는 평양 동부의 문수동에서 살았다. 각국 대사관, 국제기관, 국제 구호단체들이 있는 지역이다. 규모가 크지 않았고 가끔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위성TV를 볼 수 있었고 인터넷 접속이 가능했으나 속도가 아주 느렸다. 외교단지 안에는 외국인 학교도 있지만, 수준이 높지 않아 대부분의 외교관 자녀는 홈스쿨링을 하고 있었다. 밀러는 북한으로 떠나기 전, 그곳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외화인 달러, 유로, 위안화등을 준비해 오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구겨진 달러는 받지 않았다. 도착 직후 현지인 운전자를 통해 공항 주차장 요금정산소에서 1달러를 줬는데 구겨지고 더럽다며 거절당했다. 평양에선 물건을 산 뒤 거스름돈 대신 껌, 주스 같은 간식거리를 받는 것이 흔한 일이다. 백화점에서는 잔돈을 북한 화폐 원으로 거슬러 주기도 했다. 외국인들은 자동화폐입출금기(ATM)를 사용할 수 없었다. 외화 현금이 동나면 잠시 외국을 다녀오는 지인에게 부탁해 전달받았다. 많은 외국인들이 북중 국경 도시 단둥의 ATM에서 현금을 찾아왔다. 평양의 한 지하철 역에 거대한 김정일 초상화가 우뚝 서 있다. 그 아래를 지나가는 일은 그곳 주민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또 하나의 일상으로 보였다. ⓒ Lindsey Miller 2018년 가을 어느 날 오후 평양 시내 한 작은 아파트의 정경이다. 밀러는 북한의 기성세대가 보고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믿는 북한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늘 궁금했다. ⓒ Lindsey Miller 2018년 한 열병식에서 김정은 앞을 지나 평양 거리를 통과하는 여군들이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군중은 이들에게 풍선과 꽃을 건네며 환호했다. 밀러는 이 사진을 책 표지로 결정하는데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 Lindsey Miller 짧지만 강렬한 기억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은 밀러에게 가장 흥미롭고 강렬한 기억을 남겨주었다. 그는 이미 외신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 있었지만, 북한 방송은 회담 소식을 하루 늦게 발표했다. 알고 지내던 북한 사람들이 밀러에게 와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설명해 달라고 했다. 평양 시내에 ‘우리는 하나’라는 슬로건과 함께 김정은과 트럼프의 악수 장면을 담은 대형 사진들이 걸렸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 가요를 듣거나 TV 프로그램을 본다는 소문은 많았지만, 밀러 자신이 직접 보거나 듣지는 못했다. 북한에서 남한의 콘텐츠를 접하는 것은 최고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행위이다. 북한 사람들은 밀러가 서울에 가봤는지, 서울은 어땠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한 북한 주민은 그가 발리 해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너무 아름답다며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들은 영국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물어봤다. 그러나 성평등이나 동성 결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밀러의 초기 북한 사진에는 건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의 눈에 건축의 외양이나 디자인이 이색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빠르게 사람들로 초점이 바뀌어 자신이 바라보는 북한 사람들의 일상을 창의적인 시각으로 담았다. 간혹 차마 사진에 담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고 밀러는 그들을 존중하기 위해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처음엔 책을 출판할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영국으로 돌아가 사진을 정리하면서 북한에서의 추억이 떠올랐고 자신이 겪은 경험과 감정들을 돌이켜보면서 이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책은 연출되지 않은 사진 200장과 16편의 이야기로 엮었다. 북한의 체제나 정치 상황보다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췄다. 이라는 제목에는 함의가 많다. “북한이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간단히 답하긴 정말 어려웠습니다. 제가 아는 모든 곳, 제가 경험해 본 모든 장소 중, 이 세상에 북한과 같은 곳은 없거든요. 신분의 외국인들에게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확연히 구분돼 있어요. 제 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입니다.” 밀러는 북한에서 영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이미 북한에 먼저 살아본 경험이 있어 더욱 가슴이 벅찼고, 비무장지대(DMZ)에서 특히 감정이 남달랐다. “비록 국경은 닫혔지만 북한에 대한 마음까지 닫아서는 안 됩니다. 북한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한 말이다.

탈북민 환자들의 한의사

Tales of Two Koreas 2021 SUMMER

탈북민 환자들의 한의사 최초의 탈북 한의사 석영환(石英煥 Seok Yeong-hwan) 원장의 ‘영등포 100년 한의원’은 북한의 전통침술을 적용한 치료법으로 알려져 있다. 탈북민과 중국 교포들이 그의 북한식 진료의 혜택을 받고 있다. 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등포 100년 한의원’의 풍경은 여느 한의원과 조금 다르다. 실내 구조는 비슷하지만, 환자들이 맞는 침(鍼)이 사뭇 굵다. 얇고 가느다란 침만 보던 이들은 겁먹을 정도다. 이곳은 침술이 독특하다. 북한 전통침술인 ‘대침’, ‘불침’으로 유명하다. 지름 0.5cm 정도의 황금 침도 있다. 평양의 고위간부들이 많이 받던 치료법이라고 한다. 서울 문래동에 위치한 이 한의원의 석영환(55세) 원장은 남북한 한의사 면허 1호다. 진료실 책장에 꽂혀 있는 ⟨고려의학(高麗醫學)⟩ 같은 북한 책들이 말 해주듯 석 원장의 진료는 ‘고려의학’ (Koryo medicine), 즉 북한식 한방 요법에 따른다. 환자는 대부분 서울 시민이지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탈북민과 중국 교포도 많다. 중국 교포들은 식사나 생활습관이 북한 주민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이곳에서 처방하는 약과 치료법이 제법 잘 맞는다고 한다. 100년 한의원이 광화문 부근에 있었을 때는 정부 고위인사들도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높아만 가는 건물 임대료를 견디다 못해 2017년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문래동으로 옮겨 ‘영등포 100년 한의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실내 규모는 과거보다 2배나 넓어져서 661㎡(200평) 가 되었다. 또 하나의 도전 석 원장의 고향은 양강도 갑산이다. 그는 1998년 10월 지금의 아내인 연인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 후 결혼을 했고 현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큰 아들, 고교생인 둘째 아들,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삼 형제를 비롯한 가족의 소식은 끊긴 지 오래다. “연기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다고 해요.” 그저 간단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 당시 석 원장은 현역 군의관 신분이었다. 남한의 대위계급에 해당하는 북한군 88호 병원 응급실 진료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인 평양의학대학 동의학부를 졸업하고 ‘고려의사’ 자격을 딴 그는 북한 기초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초의학연구소는 흔히 ‘만수무강연구소’로 불린다. 아버지가 호위사령부(청와대 경호실에 해당) 고급군관이어서 혜택을 누린 셈이라고 했다. 그가 북한의 현실에 절망을 느끼게 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지방의 군부대병원으로 출장 가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군인들을 보면서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의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남쪽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제3국을 경유하지 않고 탈북 경로를 휴전선으로 선택한 것은 군 장교의 신분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홀몸이 아니었기에 더욱 커다란 모험이었다. 기차를 타면 검문을 받아야 했으므로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서 얻어 타는 등 온갖 수단을 써가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그는 남한 정착 3년 만에 한의사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얻었다. 남북한 한의사 자격을 모두 따낸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민의 의사자격 기준이 없었다. 1999년 대한한의학회 전문가들의 테스트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서 국가고시 응시 자격을 얻어냈다. 교회에서 만난 교수들로부터 대학 교재를 추천받고 한의사 국가고시 수험서를 사서 동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한자가 가득한 남한의 한의학 교재를 읽는 게 힘들었다. 북한에서는 기초한자 정도만 배웠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도서관에서 옥편을 잡고 진땀을 흘리고 나자 한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한의사 자격을 딴 후 경희대 한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2002년 마침내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열어 새 삶의 터전을 잡았다. 이후 19년 동안 그는 형편이 어려운 탈북민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고 있다. “어디가 아프다고 얘기해도 말이 달라 못 알아듣는 병원이 많다고 합니다. 나라도 알아주니 환자가 마음이 덜 불편하고 하소연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제가 그들보다 먼저 서울에 왔고, 같은 문제를 이미 겪었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침 요법입니다. 북한의 침은 아주 크거든요. 그래도 맞고 나면 시원해 탈북민이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1. 석 원장은 자신이 힘들게 서울에 정착해 자격증을 따고 한의원을 개원하는 과정에서 남한사회에서 받은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무료진료 등의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2004년부터 매주 이어온 봉사활동이 지금은 코로나 19로 잠시 보류되는 중이다. 2. 그가 창립하고 이사장으로 있는 ‘하나사랑협회’는 현재 남한과 북한 출신의 의사, 간호사를 비롯한 자원 의료 봉사 인원이 40명으로 늘어났다. 또 하나의 도전 석 원장의 고향은 양강도 갑산이다. 그는 1998년 10월 지금의 아내인 연인과 함께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왔다. 그 후 결혼을 했고 현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큰 아들, 고교생인 둘째 아들, 중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삼 형제를 비롯한 가족의 소식은 끊긴 지 오래다. “연기도 없이 사라졌어요. 소리소문없이 증발했다고 해요.” 그저 간단히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탈북 당시 석 원장은 현역 군의관 신분이었다. 남한의 대위계급에 해당하는 북한군 88호 병원 응급실 진료부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소속인 평양의학대학 동의학부를 졸업하고 ‘고려의사’ 자격을 딴 그는 북한 기초의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기초의학연구소는 흔히 ‘만수무강연구소’로 불린다. 아버지가 호위사령부(청와대 경호실에 해당) 고급군관이어서 혜택을 누린 셈이라고 했다. 그가 북한의 현실에 절망을 느끼게 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지방의 군부대병원으로 출장 가서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군인들을 보면서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료 의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남쪽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함께 탈북을 결심했다. 제3국을 경유하지 않고 탈북 경로를 휴전선으로 선택한 것은 군 장교의 신분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홀몸이 아니었기에 더욱 커다란 모험이었다. 기차를 타면 검문을 받아야 했으므로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서 얻어 타는 등 온갖 수단을 써가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그는 남한 정착 3년 만에 한의사국가자격시험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얻었다. 남북한 한의사 자격을 모두 따낸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탈북민의 의사자격 기준이 없었다. 1999년 대한한의학회 전문가들의 테스트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에서 국가고시 응시 자격을 얻어냈다. 교회에서 만난 교수들로부터 대학 교재를 추천받고 한의사 국가고시 수험서를 사서 동네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한자가 가득한 남한의 한의학 교재를 읽는 게 힘들었다. 북한에서는 기초한자 정도만 배웠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도서관에서 옥편을 잡고 진땀을 흘리고 나자 한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한의사 자격을 딴 후 경희대 한의대학원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다. 2002년 마침내 ‘광화문 100년 한의원’을 열어 새 삶의 터전을 잡았다. 이후 19년 동안 그는 형편이 어려운 탈북민 환자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고 있다. “어디가 아프다고 얘기해도 말이 달라 못 알아듣는 병원이 많다고 합니다. 나라도 알아주니 환자가 마음이 덜 불편하고 하소연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제가 그들보다 먼저 서울에 왔고, 같은 문제를 이미 겪었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모른 척할 수 없습니다.”100년 한의원은 탈북자들 사이에서 ‘탈북자병원’으로 불린다. 아픈 곳이 있어 찾아가면 주머니 걱정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석 원장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한의학의 가장 큰 차이는 침 요법입니다. 북한의 침은 아주 크거든요. 그래도 맞고 나면 시원해 탈북민이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3. 석 원장은 북한의 한의학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다. 김일성 전 주석이 평소에 즐겨했던 자연요법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김일성 장수건강법⟩도 그 중 하나이다. 4. 북한의 전통 한의학인‘고려의학’ 정보가 담긴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 북한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 석 원장은 평양 기초의학연구소에서 심장·혈관계 연구원으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복용한 것으로 알려진 유심환(柔心丸), 태고환(太古丸)을 직접 만들고 있기도 하다. 두 가지 약은 각각 스트레스 질환과 노화 방지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는 고려의학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고려의사는 한방과 양방을 함께 배우죠. 양방 외과에서 수술 집도까지 배웁니다. 북한에서는 보통 한방과 양방 검사를 같이해서 진단을 내립니다. 진맥과 양방 기본검사를 다 해서 그 자료를 바탕으로 진단을 하고 치료는 주로 한방으로 합니다. 제가 고려의학부를 졸업할 당시 제 학년이 30명이었는데 그 중 한 두 명 정도만 양방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교육 기간은 6년 6개월이고, 6개월은 임상실습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인턴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남한처럼 양의학 한의학을 엄격히 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또 다른 차이점에 주목한다. “북한에서는 한글로 고려의학을 공부합니다. 남한의 한의학 교재는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 어려웠습니다. 북한에서는 객관식 문제를 풀어본 일도 없었습니다. 북한의 시험은 모두 주관식이고, 답을 작성한 후 말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한의학은 조선시대 의관 허준(1539~1615 許浚)이 편찬한 ⟨동의보감(東醫寶鑑)⟩(1610)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남북이 분단된 이후 발전 양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북한은 치료의학이 발달했다. 조선 말기 한의사 이제마(1837~1900 李濟馬)의 사상의학을 토대로 체질을 분류해 치료한다. 만성 질환은 한방치료 대상으로 꼽는다. 체질을 개선해야 면역이 형성되고 병과 싸울 수 있어서다. “북한은 한약 처방이 잘 되고 있는 편입니다. 치료 위주의 약 처방이 구체적으로 체질에 따라 배분이 잘 돼 있지요. 임상시험을 통해 객관화·규격화가 돼 있고 효능도 비교적 좋습니다. 또한 침술이 뛰어납니다. 남한에서는 자극을 덜 주기 위해서 얇고 작은 침으로 쓰지만, 북한 침은 아주 굵습니다. 굵은 침이 더 아플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는 이어 ‘환자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본인의 정신력이 우선이고, 그 다음 어떤 의사한테 어떤 약과 치료법을 처방받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남북한 양쪽의 한의학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북한에 우수한 약재가 많아 남북간의 협력연구가 바람직하지만 현재의 모든 여건이 희망적이지 않아 아쉽다고 석 원장은 말한다. 봉사활동으로 보답 석 원장은 그사이 틈틈이 ⟨생명을 살리는 북한의 민간요법⟩(2003), ⟨등산도 하고 산삼도 캐기⟩(2003), ⟨김일성 장수건강법⟩(2004), ⟨북한의 의료실태⟩(2006) 등 4권의 책도 펴냈다. ⟨김일성 장수건강법⟩은 일본어로도 번역, 출판됐다. 늦었지만 박사학위까지 딸 계획이다.그가 외부 의료봉사를 이어온 지도 어느덧 17년째가 됐다. 한의원을 개원한 지 2년 만인 2004년 다른 탈북 한의사 한 사람과 어르신 무료진료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정착하는 과정에서 남한 국민 세금을 받고 남한 사회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았습니다. 보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죠. 게다가 봉사를 하면 저 자신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냥 한없이 기분이 좋지요.”‘탈북의료인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봉사활동 조직은 2015년 ‘사단법인 하나사랑협회’로 확대 개편되었으나 석 원장이 줄곧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동안 탈북의료인수효가 늘어나고 취지에 공감한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봉사자와 후원자도 늘어났다. 한의사, 물리치료사 등 의료인력 3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30여 명의 회원들이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어떤 일이든 1호의 무게는 남다르다. 석 원장 역시 1호의 짐을 평생 짊어지고 갈 수 밖에 없는 듯하다.

하나의 코리아를 향한 공동 작업

Tales of Two Koreas 2021 SPRING

하나의 코리아를 향한 공동 작업 북한 출신 작가 코이와 그의 멘토이자 미술치료사 신형미 작가의 전시회 ‘다시, 남향집’이 2020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두 작가가 공동 작업을 통해 북한이탈주민의 남한 정착과정 및 남북한 주민들의 상호 이해와 통일을 향한 염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여 많은 관심을 끌었다. 탈북민 출신 작가 코이(Koi)는 자신을 드넓은 강물에서 맘껏 헤엄치며 살기 위해 어항을 탈출한 물고기에 비유한다. 흔히 ‘비단 잉어’로 불리는 코이는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밖에 자라지 않는다. 반면, 연못에서 15~25㎝, 강물에서는 90~120㎝까지 너끈히 큰다. 코이라는 예명이 ‘넓고 자유로운’ 남한 땅에서 그가 키워가는 당찬 꿈을 말해준다. 코이는 열여덟 살이던 2008년 12월 홀로 함경북도 청진 고향 집을 떠나 국경을 넘어 중국에 도착했다. 그가 위험한 여정을 택한 것은 앞서 가족과 함께 남한에 와 살고 있던 친한 친구의 강력한 권고 때문이었다. 부모님도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태국을 거쳐 2009년 3월, 꿈에 그리던 남한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겁 없이 넘어왔다고 당시를 돌아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면 엄두도 못 낼 것 같다며.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코이는 서울에서 미술대학 진학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고 대안학교인 하늘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다. 이 학과의 첫 탈북민 학생이었다. 2020. 목재, 아크릴페인트. 160 x 100 cm. 인사동 로포하우스에서 2020년 11월 25일부터 30일까지 열렸던 북한 출신 작가 코이와 그의 멘토이자 심리치료사 신형미 작가의 전시회 에 전시되었던 공동 작품으로 수열의 합 시그마에서 영감을 받아 한반도를 표현했다. 2020. 특수 패브릭(섬유원단) 100 x 100 cm. 수많은 사람들의 통일을 향한 염원이 모여 하나된 한반도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코이 작가의 생각을 담은 단독 작품이다. 우연, 또는 인연 입학 후 코이는 탈북청년크리스천연합회에서 미술치료사인 신형미(Shin Hyung-mee 辛亨美) 작가를 만났다. 신 작가는 코이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2013년 첫 만남에서 코이가 아주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지녔다는 걸 단박에 느꼈죠. 당시 제가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탈북청년들을 위해 지원하는 집단 심리 상담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코이가 저의 개인적인 지도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줄곧 멘토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코이는 제가 주는 모든 것을 감사하게 받으며 끊임없이 발전해나가고 있습니다.” 남북한 출신 두 작가가 ‘통일’을 주제로 아홉 작품을 선보인 ‘다시, 남향집’은 멘토와 멘티로서 이들이 이어 온 특별한 인연의 결과이자 작가 코이를 알린 첫 전시이기도 했다. 통일부 남북통합문화 콘텐츠 창작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 전시에는 두 작가의 공동 작품 3점과 각기 개인 작품 3점씩이 출품되었다. 회화, 섬유미술, 설치, 물감 프로젝트 등 다채로운 장르를 아우르는 작품들에 탈북민들이 자유와 평화 속에 더 나은 삶을 누리고자 남한으로 찾아 드는 모습을 담았다.‘남향집’은 햇볕이 잘 드는 마음 속의 따뜻한 집을 상징한다. 공동 작품 가운데 하나인 ‘시그마가 품은 한반도 지도’는 수열의 합 시그마(∑ Sigma) 에서 영감을 받아 삼천리 금수강산을 묘사했다. ‘색으로 소통하다’프로젝트에 참여한 59명이 힘을 더한 작품이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북한이탈주민 30명과 남한 시민 29명이 각자 생각하는 통일에 대한 이미지를 자기만의 색으로 표현해 물감을 만들었고, 여기에 두 작가가 작품 활동 중에서 느낀 ‘감정의 색’을 더해 모두 101개의 물감을 전시했다. 전시가 끝난 뒤 이 물감들은 통일교육이 필요한 여러 곳에 기증되었고, 앞으로 릴레이식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코이 작가의 단독 작품 ‘너와 함께 걷는 남향집 가는 길’은 마치 그가 북한에서 매일 신고 다녔던 운동화 50켤레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설치미술이다. “북에 있는 제 친구 50명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한 명 한 명에게 손편지를 신발에 써넣었어요. 북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과 통일에 대한 소망을 담았습니다. 많은 관람객들이 이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무셨어요. 운동화 속 편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꼼꼼히 읽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계셨고, 어떤 분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는 감상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제게도 가장 소중한 작품이었죠.” 그의 또 다른 작품‘유닛 하모니(Unit Harmony)’는 소원을 적어 날리면 이뤄지는 종이비행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나 하나의 유닛은 각기 다른 개인의 꿈을 상징한다. 이 모든 꿈들이 하나로 합쳐져 더 큰 꿈을 이루듯이 통일을 바라는 염원이 모여 하나된 한반도를 이룰 수 있음을 표현했다 소통과 인내 신형미 작가의 단독 작품 ‘오래 달리기 트렉’은 미술치료사로 일하면서 그가 만난 수많은 탈북민 가운데 기억에 또렷이 남는 46명의 길고 힘든 여정을 구현했다. “저에게 오래 달리기는 어릴 때부터 어려운 일이에요.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에 도착하기까지 위험한 순간도 경험했고, 안도의 순간들도 있었을 텐데 장거리 트렉에서 느끼는 감정과 비교하면 어떨까 상상해 보는 것이죠.” 신 작가의 또 다른 단독 작품 ‘자리’는 의자 시리즈 중 하나로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몇 명의 탈북민 내담자를 표징한다. 남다른 멘토와 멘티 관계이지만 두 작가는 살아온 환경과 과정이 다른 만큼 이번 작업을 하면서 가치관의 차이를 실감하기도 했다. 소통과 배려, 인내가 필요했다. 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남과 북의 통합’을 고민했다. 코이 작가는 예상보다 많은 관람객들이 자신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고 말한다. “코로나 19로 관람이 저조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뜻밖에 많은 분들이 찾아줘서 놀랐습니다. 저의 재능이 통일을 위해 의미 있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특히 혼자 무언가를 해내는 것보다 ‘남한 출신 작가와 북한 출신 작가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통일의 첫 단추를 끼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시는 신형미 작가가 기획을 제안해 추진했다. 2008년 서울여대와 인천동부교육청 프로젝트 ‘하나 됨을 위한 탈북 청소년 예술치료 교육’이 발단이 되어 열린 전시회 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시다. 올 봄 민주평화통일자문회 평화나눔갤러리에서 한 번 더 전시회가 열린다. “저희는 기획단계부터 일회성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되는 전시로 준비했습니다. 이번을 계기로 더 큰 전시 프로젝트로 발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소통하며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으로 북한에 자연스럽게 다가가고자 가교 역할을 할 계획입니다.”신 작가의 설명이다. 이 모든 꿈들이 하나로 합쳐져 더 큰 꿈을 이루듯이 통일을 바라는 염원이 모여 하나된 한반도를 이룰 수 있음을 표현했다. 2020. 패브릭, 핸드라이팅, 신발 설치작품 50컬레. 코이 작가가 자신이 북한에서 신던 것과 같은 운동화 50 켤레 안에 친구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손으로 쓴 편지를 넣어서 그리움을 표현했다. 미술치료사 신형미 작가(왼쪽)와 그의 멘티이자 북한 출신 작가인 코이가 이어온 특별한 인연은 ‘통일’을 주제로 아홉 작품을 선보인 전시회 에서 첫 열매를 맺었다. 신 작가는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코이 작가의 예술 세계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 즐겁다고 말한다. 꿈을 향한 발걸음 코이 작가는 현재 패션 관련 기관에서 일하며 홍익대 패션대학원 패션비즈니스학 석사과정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2016년에는 코오롱그룹 후원으로 커먼그라운드에서 남북한 청년 작가 9명이 함께한 전시회를 기획하고 참여했다. 그의 꿈은 통일에 대비해 패션산업과 문화예술 분야에 영향력 있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신형미 작가는 2004년부터 탈북민들과 깊은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한 탈북소년을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미술치료사인 그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하나원에서 그림을 통한 심리상담으로 그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소통해왔다. 미국 오하이오대학교에서 순수미술 회화를 전공한 신 작가는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치료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차의과대학교 임상미술치료학 박사과정 중이다. 탈북민이 남한 사회에서 건강한 삶을 영위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한 국가•사회적 과제라는 신념으로 한국 사회의 다양한 시각 전환 교육을 위한 여러 활동을 준비 중이다.

잊힌 아이들의 이야기

Tales of Two Koreas 2020 WINTER

잊힌 아이들의 이야기 지난 6월 개봉된 영화 은 1952년 ‘위탁 교육’을 위해 동유럽 5개국으로 보내진 북한 전쟁 고아들의 흔적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다. 뉴욕국제영화제 등 해외 주요 영화제에 초청된 이 영화의 제작을 위해 감독은 16년 동안 50번 넘게 동유럽과 한반도를 오가며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루마니아의 소도시 시레트(Siret)에 어린이들을 태운 특별열차가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도착했다. 한껏 상기된 표정의 어린이들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열 살 안팎의 이 아이들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온 북한의 전쟁 고아들이었다. 위탁 교육을 받기 위해 줄잡아 5천여 명의 아이들이 이처럼 루마니아를 비롯해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유럽 5개국에 보내졌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남한의 전쟁 고아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진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 아이들이 동유럽으로 간 사실은 최근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은 오랫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동유럽행 북한 전쟁 고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덕영(Kim Deog-young 金德榮) 감독이 2004년부터 16년간 50번 넘게 동유럽을 오가며 사재와 발품을 팔면서 집념을 쏟아부은 결과이다. 김 감독이 처음 루마니아행을 결심한 것은 대학 2년 선배인 영화감독 박찬욱(Park Chan-wook 朴贊郁)으로부터 기막힌 사연을 전해 들은 뒤였다. “북한으로 송환된 북한인 남편을 40년 넘게 기다리고 있는 루마니아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북한 전쟁 고아 문제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죠.” 어떤 부부 그가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1952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열여덟 살의 제오르제타 미르초유(Georgeta Mircioiu)는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100㎞ 정도 떨어진 시레트 조선인민학교에 미술 교사로 부임한다. 그곳에서 북한 고아 관리 책임자로 파견된 당시 26세의 청년 교사 조정호를 만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1957년 루마니아와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아 결혼에 이른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고아 소환 정책으로 두 사람은 1959년 평양으로 가야 했고, 귀국 직후 남편 조 씨는 숙청당해 지방의 탄광 노동자로 전락한다. 1960년대부터 주체사상이 확립되던 북한에서는 외국인 배척 운동이 일기 시작해 국제결혼을 했다가 추방당하는 외국인들이 속출했다. 남편과 떨어져 살던 미르초유는 두 살짜리 딸이 칼슘 부족으로 병에 걸려 1962년 딸과 함께 루마니아로 일시 귀국했는데, 이후 북한 입국이 불허된 1967년 남편과 연락이 끊겼다. 그 뒤 미르초유는 여든여섯 살이 된 지금까지 남편의 생사(살아 있다면 94세)만이라도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북한 당국에 수없이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83년부터 ‘실종’이라는 짤막한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어느덧 환갑이 된 딸과 함께 부쿠레슈티에서 사는 그는 지금도 국제기구에 호소문을 보내면서 남편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미르초유는 ‘정호 1957’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결혼 금반지를 평생토록 끼고 있다. 남편과의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미르초유는 지극 정성을 기울여 『루마니아-한국어 사전』(13만 단어)과 『한-루 사전』(16만 단어)을 만들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절절한 사연은 김 감독에 의해 지난 2004년 KBS TV 6•25 특집 로 방영됐다. 한편 동유럽 5개국에서 북한 고아들의 흔적을 찾던 김 감독은 루마니아 기록필름보관소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내리는 북한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4분 30초짜리 영상을 극적으로 발견했다. 하얀 장갑을 낀 직원이 먼지를 뽀얗게 덮어쓴 은빛 통에서 꺼낸 35㎜ 필름을 보는 순간 미르초유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그 순간, 김 감독은 “이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계기로 관련 자료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반세기 전의 북한 관련 문서나 사진, 영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관계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 증언을 듣는 것부터가 불가능했다. 그때부터 김 감독은 동유럽 곳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행여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문서 보관소, 관련 학교, 기숙사를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북한 아이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 역사학자, 언론인들의 증언을 카메라에 담았다. 외교 문서 등으로 추정하는 동유럽행 북한 전쟁 고아는 5천여 명이지만, 김 감독은 1만 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말한다. 송환과 이별 영화 에는 북한 아이들이 현지 아이들과 함께 수업하고 뛰어노는 모습들이 흑백 영상으로 생생하게 담겼다. 영상에는 이 아이들의 단체 생활 모습도 담겨 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김일성 얼굴이 그려진 인공기를 향해 경례를 한 뒤 를 부르는 장면이 이채롭다. 북한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던 루마니아, 불가리아 친구들은 60여 년이 지나 백발이 된 지금도 ‘백두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한국어로 부를 정도다. 이 노래는 지금도 북한에서 모든 행사 때 서곡으로 불릴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증언에 따르면 이 아이들의 일상이 항상 군인처럼 엄격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같이 축구도 하고, 동산 같은 곳에서 배구도 하며 놀았죠. 다들 친형제처럼 지냈어요.” 불가리아인 친구 베셀린 콜레브의 증언이다. 그에 따르면, 북한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엄마, 아빠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아이들의 선생님이었던 디앙카 이바노바는 색이 바랜 사진을 보여주며 “이 친구가 나를 가장 많이 따랐던 ‘차기순’이었어요.”라고 이름까지 기억했다. 김 감독은 당시 기숙사를 탈출한 일부 아이들이 인근에 정착해 현지인과 결혼하고 택시 기사 등으로 생활했다는 제보를 받고 추적했지만, 끝내 이들을 찾아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위탁 교육은 당시 동유럽 국가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련이 기획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쟁 고아를 돌봐주는 동유럽의 선한 모습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홍보하려는 프로파간다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기술과 문화가 앞선 동유럽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장차 국가 건설에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북한이 이러한 위탁 교육을 수용했을 것이라고 김 감독은 추측한다. 1956년 낯선 땅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던 북한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본국 소환령으로 정들었던 친구, 선생님들과 이별을 해야 했다. 아이들은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북한으로 차례차례 송환되었다. 당시 헝가리를 비롯해 동유럽 국가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자유화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일성이 1956년 불가리아를 방문하는 동안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제거하려는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났다. 또 폴란드에 있던 북한 고아 2명이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 붙잡히는 사건도 터졌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 남한의 전쟁 고아들이 미국이나 유럽으로 보내진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 아이들이 동유럽으로 간 사실은 최근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객관적 자료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귀국 열차가 북한 땅에 들어서자 역마다 2~3명씩 내리게 했다고 합니다. 만약의 집단 행동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타국 생활을 같이 한 아이들을 분리시킨 것으로 볼 수 있지요.” 김 감독의 얘기다. 아이들이 보내오던 편지는 채 3년이 되지 않은 1961년 이후 북한 당국의 검열로 말미암아 영원히 끊겼다. 마지막으로 보내온 편지에는 “입을 옷이 있었으면 좋겠다. 뭔가를 쓸 수 있는 공책을 보내달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편지 끝에 언제나 “엄마, 보고 싶어요.”라고 썼다.  떠나기 전 아이들은 자신들이 살던 곳에 흔적을 남겼다. 학교 근처 숲에 이름을 새긴 오벨리스크와 기념비가 남아 있는 곳도 있다. 폴란드 프와코비치 국립중앙제2학원에서 발견된 현판에는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조선 전쟁 고아들인 우리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기념비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한글과 알파벳으로 쓰여 있다. 체코 발레치 마을 인근에 있는 중세 오벨리스크에서도 두 명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김 감독은 “10m 정도 되는 높이의 탑에 몰래 올라가 단단한 돌을 깎아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에서 떠나기 직전 아이들의 절박한 심경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에 편향된 감상에 치우치지 않으려 각별한 노력과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한다. 그를 위해 풍문에 기대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 자료를 찾아내 논란을 줄이려 노력했다. 그 결과물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때맞춰 개봉했지만, 코로나19 상황으로 흥행은 부진했다. 하지만 최근 한 재미교포의 주선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130여 개국에서 이 영화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에서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영화는 뉴욕국제영화제, 니스 국제영화제, 폴란드 국제영화제 등 13곳의 국제영화제 본선에도 진출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증언으로 밝힌 북한 음악

Tales of Two Koreas 2020 AUTUMN

증언으로 밝힌 북한 음악 오늘날 북한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의 특성과 형성 과정에 대한 재일동포 원로 예술가 8명의 증언이 책으로 묶어졌다. 국립국악원이 2019년 12월에 펴낸 『재외 동포 원로 예술가 구술 채록 – 일본 편』은 공동 저자 천현식(Cheon Hyeon-sik 千賢植), 김지은(Kim Ji-eon 金芝恩) 씨가 2년에 걸쳐 기울인 노력의 결과다. 1973년 초연된 혁명 가극 는 북한의 5대 혁명 가극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 때 헤어진 가족이 김일성 지배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를 그린다. 사진은 1955년 설립된 조총련 산하의 예술 단체 금강산가극단이 평양에 가서 를 전수받은 후 1974년 무대에 올린 장면이다. 가극 성악가 류전현(柳展鉉)이 출연했다. 남북한의 음악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70여 년 분단 상황을 거치며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음악에서도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북한에서는 전통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부터가 다르다. 남한에서 ‘국악’이라고 부르는 음악이 북한에서는 ‘민족 음악’이다. 전통 악기에 대한 태도도 양쪽이 사뭇 다르다. 남한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해 온 반면에 북한은 서양 음악 연주에도 문제가 없도록 대부분의 전통 악기를 개량해서 사용하고 있다. 국립국악원 천현식 학예연구사와 북한 음악 연구자 김지은 씨가 공동으로 집필한 『재외 동포 원로 예술가 구술 채록 – 일본 편』은 이 같은 북한 음악의 실체를 안내하는 길라잡이가 되어 준다. 이 책은 총련계 재일동포 원로 예술가 8명의 구술을 기록한 것으로 남북한 간에 왕래와 교류가 전면 중단된 상황에서 귀한 자료일 수밖에 없다. 구술에 참여한 이들은 전 금강산가극단 지휘자 김경화(金慶和), 가극 성악가 류전현(柳展鉉),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해외 담당 부소장을 맡고 있는 작곡가 이철우(李喆雨), 안무가 임추자(任秋子), 전 금강산가극단 배우이며 성악가인 정호월(鄭湖月), 작곡가 정상진(丁相鎭), 도쿄 조선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 최진욱(崔振郁), 무용수 현계광(玄佳宏)이다. 이들은 북한으로부터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 인민배우, 공훈배우 등의 칭호를 받았으며 이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2008년 4월,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중국 순회 공연을 시작한 혁명 가극 의 포스터. 이 무대에는 북한의 피바다가극단 소속 배우들을 비롯해 50여 명의 공훈예술가와 인민예술가들이 출연했다. 천현식, 김지은 씨는 국립국악원이 진행 중인 ‘재외 동포 원로 예술가 구술 채록 사업’의 첫 지역으로 선정된 일본을 2017년 이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원로 예술가 8명의 증언을 책으로 엮어냈다. 다른 이념, 다른 음악 천현식 학예연구사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북한 음악 전문가로 『북한의 가극 연구』, 『예술과 정치』(공저) 등의 책을 펴낸 바 있고 「모란봉악단의 음악 정치」 같은 논문을 쓰기도 했다. 김지은 연구자는 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한 뒤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북한 음악 예술론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그는 지난 2007년 재일 금강산가극단의 한국 공연 기획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북한 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연구자가 채록한 북한 음악에 대한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수두룩하다. “정상진 작곡가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러시아 음악의 영향을 받아 선율을 위주로 한 표제음악을 주로 작곡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향곡이든 관현악곡이든 ‘선율에 각을 뜨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오래전부터 강조해 왔다고 합니다. 서양식 테마에 의한 작곡법을 북한에서는 선율을 끊어서 단락을 많이 주는 방식으로 여기는 거죠. 그런데 요즘에는 조금 다양해져서 과거보다는 각을 조금 뜬 것 같은 창작곡이 나오는 경향도 있다고 합니다.” 천 학예연구사의 전언이다. 그는 이 책에 구술자들의 증언 외에도 남북한 음악의 다른 면들을 친절히 소개하고 있다. 그 한 예로 2019년 남한에 공개된 북한 민족 가극 ≶춘향전> 영상 자료를 보면, 남도 판소리식 탁성 창법이 아니라 맑고 청아한 서양식 벨칸토 창법을 따르고 있다. 내용에서도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에 방점을 찍는 남한과 달리 양반과 상민의 계급적 대립을 부각시키고 있다. 북한의 민족 가극은 노래와 음악을 기본으로 하는 종합적인 무대 예술을 뜻하는데, 1960년대에 시작된 전통 악기 개량과 더불어 만들어진 성악의 새로운 갈래이다. 으로부터 시작된 민족 가극은 1970년대 혁명 가극 형태로 이어졌다. 천 학예연구사는 “북한에서는 판소리를 연구용, 교육용으로 배울 뿐 대중이 향유하는 음악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남한에서는 전통 음악의 대표적 장르로 대중화된 판소리가 북한에서는 양반과 지배 계층의 정서가 배어 있다는 이유로 배척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판소리 가 북한에서 민족 가극으로 변형된 이유다. 북한의 성악은 발성과 창법, 가사와 음악 양식까지 사회주의 혁명과 인민의 감성에 맞게 변화되어 왔다. 성악 발성은 전통 민요를 부르는 ‘민성(民聲) 창법’과 서양 음악식 발성인 ‘양성(洋聲) 창법’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민족 발성의 준말인 민성은 ‘주체 발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맑고 나긋나긋하면서도 간드러지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전통 서도소리 창법을 현대 감각에 맞게 발전시킨 것이다. 민족 가극 에는 민성 가수들이 많이 출연하고, 혁명 가극 에는 양성 가수들이 주로 나오는 경향이 있다. 정호월 성악가에 따르면, 북한식 발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높은 톤의 목소리를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특히 전통 민요는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불러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메조소프라노 가수들이 늘어나면서 낮은 목소리의 노래도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르는 현상이기도 하다. 한편 김 연구자는 “정상진 작곡가에 의하면 북한의 대표적 가극 작품들 사이에도 각각의 특징이 있다”면서 “예를 들어 ≶피바다>는 민족적이면서 구수한 느낌이며, ≶꽃파는 처녀>는 세련된 선율이 많고, ≶금강산의 노래>는 조금 더 현대적인 색깔을 지녔다”고 설명한다. 이런 특성은 악기 편성에서도 드러나는데, 는 순수한 민족 악기 중심으로 창작되었고, 도 처음엔 민족 악기와 금관악기로 연주했다가 외국에 소개하기 위해 바이올린을 추가했다. 그런가 하면 는 양악기 위주의 편성으로 민족 악기는 죽관악기만 들어간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북한 음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들어 “민족 음악이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서양 음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 구술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1.안무가 임추자 선생의 약력을 소개하는 페이지. 1957년 일본에 조선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헌신한 그는 재일동포 무용계의 큰 별로 불린다. 2019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2.작곡가 정상진 씨가 조선국립교향악단의 김병화 지휘자에 대해 회상하는 내용이 담긴 페이지. 1992년 6월 도쿄 동경예술극장대극장에서의 공연 사진도 함께 게재되었다. 변화의 바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북한 음악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들어 “민족 음악이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지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서양 음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 구술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한 예를 들면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축하 공연에 참가했던 삼지연관현악단의 지휘자 장룡식(張龍植)의 인기가 매우 높아 그가 지휘봉을 잡는 공연에 관객들이 많이 모인다고 한다. 김 연구자는 구술자들을 통해 “전반적으로 북한 음악도 해외의 큰 흐름을 반영해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 엿보이고 있으며, 외국 창법도 많이 도입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정상진 작곡가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음악대학에서는 모란봉악단의 창법인 ‘모란봉식 가요 창법’을 가르친다고 해요. 이 창법은 기존의 민성, 양성에 대중가요까지 세 가지 부류로 나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최근에는 음악대학에 대중가요를 가르치는 학과가 생겼다고 한다. 반면에 과거 북한을 대표하는 공연예술 단체였던 국립민족예술단은 원로 중 상당수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세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어 가극의 경우 피바다가극단으로 일원화되고 있다는 것이 최진욱 교수가 전하는 최근 북한 음악 교육 과정의 변화이다. 특히 평양음악대학은 철저한 수재 교육을 표방하여 실력을 중시하며, 전문 외국인 강사도 많이 초빙해 수업을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 결과, 피아노 및 성악 분야 국제콩쿠르에서 입상자를 많이 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남한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이 북한에서는 여전히 높은 명성을 유지하고 있고 윤이상관현악단, 윤이상연구소 등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천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평양에는 윤이상 음악에 미친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이 구술자들의 증언이다. 북한의 음악종합대학에는 민족학부, 양악부, 작곡학부 등의 학과가 있는데 이론학부에서 윤이상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오랫동안 재즈나 록 음악이 대부분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왔는데 “서양의 대중 가수들이 마약을 복용하고 너절한 생활을 한다”고 여긴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일부 재즈 연주자들의 무정부주의 사상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오늘날 북한 음악에는 스윙이나 비트 같은 리듬이 녹아 있다는 김 연구자의 의견에 정상진 작곡가도 상당 부분 동의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예술가들은 남한에서 ‘북한판 걸그룹’으로 불려지는모란봉악단 소속 가수들이다. 2012년 김정은 국무위원장 체제 출범과 함께 결성된 악단으로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당시 북한측 공연 단장을 맡아 남한에도 잘 알려진 현송월(玄松月)이 악단장이다. 단원의 대부분은 김정은 위원장의 부인 리설주(李雪主)가 다닌 금성학원이나 평양음악무용대학 출신이어서 리설주가 결성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란봉악단은 공훈국가합창단과 더불어 김정은 시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공연 형식에서도 다른 단체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또한 2015년 김정은의 지시로 창단한 금관악기 위주의 경음악단 청봉악단(靑峰樂團)도 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음악 정치 천 학예연구사는 “전통 악기를 개량해서 쓰고, 퓨전 음악을 시도하는 측면에서는 북한이 남한을 앞서간다”고 평가했다. 북한에서는 악기 개량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12현이던 가야금 줄 수가 19현, 21현으로 늘어났고, 5음계 역시 7음계로 확장되며 파격적인 변화가 진행돼 왔다. 북한의 개량 악기 가운데 옥류금, 장새납, 대피리 같은 것은 남한에서도 적극적으로 연주에 수용하고 있다. 두 저자는 “북한 음악은 정치를 빼고 얘기할 수 없고, 북한에서는 음악이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의 배경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음악은 정치에 봉사해야 한다. 정치가 없는 음악은 향기가 없는 꽃과 같으며, 음악이 없는 정치는 심장이 없는 정치와 같다”라고 규정한 사실이 있다. 남한에서는 음악이 개인의 즐거움과 취향을 기본으로 하는 것과 달리 북한에서는 음악이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오늘날 남북한의 음악이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

Tales of Two Koreas 2020 SUMMER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 분단 상황이 70년 이상 계속되면서 남북한의 미술은 상반된 이념적, 정치사회적 환경에 따라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한국전쟁에 대한 그림에서도 양쪽의 기억은 사뭇 다르다. 남북의 화가들은 각기 다른 관점과 양식으로 전쟁을 기록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된 후 3일 만에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화가들은 대부분 양식 배급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좌익 단체인 조선미술동맹(Korean Art Alliance)의 주도 아래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그려야 했다. 같은 해 9월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이 퇴진하자 이들은 적에게 부역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때 공산 치하에서 북한군 협력에 앞장섰던 기웅(奇雄), 김만형(金晩炯)을 포함한 여러 화가들이 북쪽으로 떠났는데 그 이전에 이미 북으로 갔던 사람들까지 합치면 월북 미술가는 대략 40여 명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 사람도 있겠지만, 공산 치하에서의 행적이 문제가 될까 두려워 마지못해 월북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같은 민족이 이념으로 나뉘어 서로를 적으로 여기며 싸우는 과정에서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된 커다란 역사적 시련이자 충격이었다. 이러한 민족적 비극을 다룬 걸출한 문학 작품들은 꽤 많이 나왔지만, 미술 작품은 그렇지 못했다. 남북한 모두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전쟁의 참상에 비해 실제로 전투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남한 국방부에서 관리하던 종군화가단(Army Signal Corps)에 속해 있었던 유병희(柳秉熙)의 (1951)다. 이 작품은 1951년 6월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를 그리고 있다. 태극기는 화면 위에 높이 세워져 있고, 북한의 인공기는 피에 젖은 채 땅에 떨어져 있다. 그림은 국군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대한민국 해병대 5대 작전 중 하나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약 2,260여 명의 북한군과 700여 명의 국군이 희생되었다. <38선(The 38th Parallel)>. 김원(金原). 1953. 캔버스에 유채. 103 × 139 ㎝. . 남관(南寬). 1963. 캔버스에 유채, 콜라주, 부식. 97.5 × 130.5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피난민들의 참상 한국전쟁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시사만화가 김성환(金星煥; 1932~2019)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8세의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그는 「연합신문」에 라는 제목의 만화를 연재하고 있었다. 서울이 북한군에 넘어가자 그는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다락방에 숨어 지내면서 거리에서 목격한 장면을 약 110점의 생생한 수채화 스케치로 남겼다. 이 중에는 국군이 막강한 화력을 과시하던 소련제 탱크 T34를 빼앗고, 주변에 북한군 시체가 널려 있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당시 다수의 화가들은 전투 현장을 사실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피난민의 고달픈 생활이나 혼란스러운 피난길의 상황을 화폭에 담았다. 화가들 자신이 피난민의 일원으로 매일 겪어야 했던 가장 절박한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양 출신으로 전쟁 전에 월남한 김원(金原 Kim Won; 1912~1994)은 1953년 작 <38선>에서 분단의 선을 넘으려는 북한 피난민들의 행렬을 비장하게 그려냈다. 앞에 선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안고 오열하거나 아이를 안거나 업은 채 힘들게 언덕을 넘고 있다. 대지의 어두운 청색과 붉게 물든 하늘이 이들의 절망과 고통을 표현한다면, 오른쪽 언덕 위의 밝은 광선은 희망을 상징한다. 전쟁에 대한 참혹한 기억은 전후 한국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가던 시기에도 계속 그림으로 제작되었는데 대체로 은유적이거나 추상적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소련이나 북한에서 성행하던 사회주의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 미술이 정치적으로 오염되었으며 선동성이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이러한 추세는 세계적인 것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나 미국 화단에서도 사실주의는 외면당하고 추상미술이 강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실주의 회화는 정치적이거나 좌파 계열로 인식되었으며, 예술로서 평가조차 하지 않으려는 시각도 존재했다. 전후 한국 미술인들 역시 해외 미술의 동향이었던 추상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치색을 피하고 전쟁의 상처에 대한 분노, 아픔, 허무감, 가족의 상실을 추상적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다. 일례로 남관(南寬 Nam Kwan; 1913~1990)은 전쟁 중에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하는데, 피난길에서 목격한 참상들이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63년 작 에서는 그러한 잠재된 기억들이 침울하고 회상적이며 감상적인 분위기로 전달된다. 화면에는 인간의 형상이나 기호 또는 상형문자와 같은 형태들이 부유하듯이 자리 잡고 있다. 크고 작은 획으로 이루어진 형태들은 시간이 정지되고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배경 속에서 비극적인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부분). 이쾌대(李快大). 유채. 1958. 200 × 700 ㎝. . 정종여(鄭鍾汝 Chung Chong-yuo). 1958/1961(개작). 조선화. 154 × 520 ㎝.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Fatherland Liberation War)으로 부르는 북한에서 그려진 전쟁 관련 그림들은 남쪽과 판이하게 달랐다 … 북한 미술에서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다고 해도 전투 장면보다는 주로 북한군을 도와주는 영웅적인 인민들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 김의관(金義冠). 1966. 조선화. 121× 264 ㎝.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영웅적인 인민들의 모습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Fatherland Liberation War)으로 부르는 북한에서 그려진 전쟁 관련 그림들은 남쪽과 판이하게 달랐다. 전후 북한이 채택했던 미술의 방향이 사회주의 사실주의였기 때문이다. 평양미술대학에서도 러시아 미술은 정규 과목이었고, 화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역사화처럼 극적이면서도 영웅적인 인물들의 구성을 배웠다. 특히 월북 작가로 한국전쟁을 주로 그린 화가는 남한에 있을 때부터 장엄한 군중화로 주목받았던 이쾌대(李快大 Lee Quede; 1913~1965)였다. 그의 대표적인 전쟁화 (1958)는 북한이 중공군의 참전에 감사하면서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다지기 위해 평양의 모란봉 구역에 건립한 조중 우의탑(Sino-Korean Friendship Tower) 내부에 그려진 벽화이다. 그림 중앙에는 중공군이 미군과 국군을 물리치는 상감령(上甘嶺)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 장면이, 오른쪽에는 패잔한 미군이, 윗부분에는 승리한 중공군이 등장한다. 북한 미술에서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다고 해도 전투 장면보다는 주로 북한군을 도와주는 영웅적인 인민들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월북 화가였던 정종여(鄭鍾汝 Chong Chong-yuo; 1914~1984)가 국가미술전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1961)는 강원도 고성 주민들이 눈보라 속에서 전선에 탄약과 음식을 나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인물들과 동물들의 움직임이 리듬감 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함축적인 필선이나 먹의 농담, 원근법적인 배치로 공간감이 잘 살아나 있다. 1950년대만 해도 북한에서는 유화로 그리는 화가가 붓과 먹으로 그리던 동양화가(ink wash painters)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조선화(Chosonhwa)’가 권장되었다. 김일성이 “서양에서 들어온 유화보다는 전통적인 붓과 먹을 사용하는 고유한 조선화가 민족적 형식이며, 이를 주체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조선화의 약점은 색채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색채를 사용하여 선명하고 간결하며 아름답고 힘있게 인민들의 투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그렇게 색채 조선화를 강조했던 그가 칭찬한 작품들로는 김의관(金義冠 Kim Ui-gwan; 1939~)의 (1966)과 리창(李昌 Ri Chang; 1942~)의 (1966)가 있다. 은 강원도 고성군 남강마을에서 추수한 볏단 속에 인민군을 숨기고, 총을 든 강인한 여성들이 소를 끌면서 영웅적으로 싸우는 작품으로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일등상을 받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 미술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작품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보다는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그린 작품들이 양적으로 월등히 많다. 조국해방전쟁은 실패로 끝난 전쟁이었고, 항일 투쟁을 통한 김일성 우상화가 우선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평화의 꿈을 담은 베를린의 예술 정원

Tales of Two Koreas 2020 SPRING

평화의 꿈을 담은 베를린의 예술 정원 독일 수도 베를린에 지구상 마지막 분단의 땅인 남북한의 식물이 한데 어우러질 예술정원이 탄생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2019년 5월 23일 포츠담광장의 쿨투어포룸(Kulturforum)에 조성된 한시적인 정원 ‘제3의 자연 (Das dritte Land)’은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중요성을 독일과 남북한이 공유할 수 있는 뜻깊은 장소이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 인근에 조성된 이 예술정원은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에서 착안한 백두대간으로 형상화됐다. 현무암과 흙으로 만든 축소 백두대간에서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듯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줄기로 남북을 잇는 주축이자 자연 생태계의 핵심축을 이루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북쪽 경계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을 통해 남해안으로 맥이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태학적인 면을 넘어 인문사회학적인 면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평화와 화해를 향한 무언의 기도와도 같은 이 신비한 예술정원은 40대 예술인 3명이 의기투합한 합작품이다. 금아트프로젝트(Keum Art Projects)의 김금화(Kim Keum-hwa 金錦和) 큐레이터와 설치미술가 한석현(Han Seok-hyun 韓碩鉉), 김승회(Kim Seung-hwoe 金承會) 두 작가가 3년여의 준비 끝에 일궈냈다. 기획과 조직은 김금화 큐레이터, 작품의 전체 비주얼은 한석현 작가, 식물 관련 부분은 김승회 작가가 나눠 맡았다. 한석현(왼쪽), 김승회 두 설치미술 작가가 베를린 포츠담광장 쿨투어포룸에 조성된 예술 정원 ‘제3의 자연’에 식물을 식재하고 있다. 이 정원은 베를린 장벽 철거 30주년을 기념하고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2019년 5월 개장했으며, 2020년 10월까지 방문객을 맞이할 예정이다. ⓒ 금아트프로젝트(Keum Art Projects) 한반도 중부 이북의 고산 지대에서 자생하는 바람꽃(Anemone narcissiflora L.)이 활짝 피어 있다. 작가들은 흑백의 수묵화적 정취를 표현하기 위해 이 밖에도 오랑캐장구채, 기생꽃, 은꿩의다리, 큰까치수염 등 흰 꽃이 피는 식물들을 검은 바위에 흙을 얹고 심었다. 문화와 정서의 동질성 김금화 큐레이터는 베를린에서 현대예술 독립기획사를 운영하면서 한국과 독일의 작가, 갤러리, 기업의 예술 전시 프로젝트를 돕고 있다. 한석현 작가는 현대 미술과 생태학적 실천의 확장적 결합에 천착해왔다.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김승회 작가는 분단된 베를린 장벽과 통일 이후 장벽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회적·도시건축학적·생태학적 변화에 주목해왔다. 미술과 조경의 소통이 가능한 공공미술을 기반으로 삼는다. 백두대간의 지리적 특성이 한민족의 문화와 정서의 동질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한석현 작가는 이 정원을 구상하면서 시각적 표현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말한다. “ 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진경산수화의 걸작이며 남북한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 남북의 문화적 감수성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문화적 배경을 이번 프로젝트에 넣으면서 비 갠 뒤 안개가 자욱한 산자락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그는 한반도의 산세가 담고 있는 수묵화적 풍경을 정원 예술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탐색한 끝에 결국 검은 바위 밑에서 피어나는 흰 색깔의 야생화와 안개 분무 장치를 통해서 산수화의 정취를 표현해 냈다. 두 작가들은 한민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백두대간을 형상화하기 위해 현무암과 흙으로 모형을 만들고, 인공 분무 장치로 산자락에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풍경을 연출했다. ⓒ 금아트프로젝트(Keum Art Projects) “북쪽의 꽃을 심고 싶다고 했을 때 다들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방문객들에게 선사하는 게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3의 자연’은 성 마테우스 교회 앞 부지에 1,250㎡(25×50m) 넓이로 조성되었으며, 당초 남북한에서 자생하는 식물 60종(남한 식물 37종, 북한 식물 23종) 3,000주를 심을 계획이었으나 북한 측의 미온적 태도로 인해 현재 45종(남한 식물 31종, 북한 식물 14종) 1,500주만 식재되어 있다. 수묵화적 풍경 그가 처음 예술 정원을 구상한 것은 2016년 베를린 베타니엔 예술가의 집(Kunstlerhaus Bethanien)에서 입주 작가로 머물고 있을 때였다. “2016년 봄 베를린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한없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독일 통일이 이런 안정감과 평화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는 순간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독일 통일이 양측이 서로 원하고 자유롭게 왕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도 정치적 결정만 기다리기보다는 남북한 사람들이 더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 10여 년간 저 자신조차도 누군가와 통일에 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는 데 생각이 미쳐서 남북한과 관련된 작업을 하고 싶어졌어요” 예술 정원의 핵심 주제는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이다. ‘제3의 자연’이란 명칭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작명은 김금화 큐레이터가 했는데, 르네상스 시대 철학자 자코포 본파디오(Jacopo Bonfadio)가 정원을 인간이 만든 ‘제3의 자연(Terza Natura)’이라 정의하고 예술의 한 분야로 끌어올린 데서 착상했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남북한 경계 없이 어우러진 한반도의 산수와 초목을 감상할 수 있다. “정원은 자연에 대한 동경,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됐습니다. 이러한 정원의 의미에 분단된 남북한의 현재를 뛰어넘는 한반도의 유토피아적 상상을 중첩시킨 제목입니다.” 상상과 현실 그러나 작가들의 이런 구상은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엄정한 분단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기획 초기에 호의적이고 협조적이었던 북한 측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소극적 태도로 돌아섰다. 그 결과 현재 예술 정원에는 작가들이 처음 선별한 60종 3,000주의 남북한 식물 가운데 절반가량인 45종 1,500주만 심겨 있다. 북한에서 가져오기로 한 식물이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 때문에 전달되지 않아서다. 그래서 북한 쪽 백두대간이 자생지인 야생화들은 경북 봉화군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가져와 아쉬움을 달랬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큐레이터와 작가들은 북측에서 직접 식물들을 가져올 방법을 찾고 있다. 베를린자유대학교 소속 베를린 식물원, 한국 국립수목원, 북한 조선중앙식물원 등과 접촉 중이다. 그 밖에도 어려움은 또 있었다. 대도시 베를린에서 예술 정원을 조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행정적 허가를 받아내는 게 최대 관건이었다. 베를린 공원관리청으로부터 허락을 받는 힘겨운 과정은 김금화 큐레이터가 발 벗고 나섰다. 적법한 절차를 밟고, 규격과 시공 방법도 독일 표준을 따라야 했다. 공원관리청, 식물보호관리청 등의 규정과 작가들의 예술적 아이디어 사이에서 타협해야 할 것들이 숱했다. 또 다른 문제는 재정이었다. 다행히 2019년 3월 한 달 동안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3만 2,500유로를 모금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국내 유명 배우들과 뮤지션 등 각계 인사들이 프로젝트에 공감해 응원 메시지를 보냈으며, 기획과 홍보에 힘을 보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독일 주재 한국문화원, 독일 크룰재단(Hans and Charlotte Krull Foundation) 등에서도 후원이 뒤따랐다. 아직 북한 땅에서 자란 식물을 기다리고 있는 미완의 단계이지만 어렵게 이룬 성과는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당초 2019년 11월 15일까지였던 개장 기간도 베를린 주민들과 베를린 미테(Mitte) 지구 문화국의 지지와 성원으로 올해 10월 30일까지 연장됐다. 독일 당국의 지원 2019년 5월 23일부터 11월 15일까지 1차 개장 기간에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려 분위기를 띄웠다. 첫날 공연을 펼친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Jo Su-mi 曺秀美) 씨는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남북 교류와 평화를 기원하는 예술 정원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날 개장 행사에서는 가야금 연주자 주보라(Ju Bo-ra)와 퓨전 타악기 핸드팬(Handpan) 연주자 진성은(Jin Sung-eun)의 합동 연주도 있었다. 6월 7일에는 수화(手話)를 하면서 북한 가요 을 불러 유명해진 싱어송라이터 이랑(Lee Lang 李瀧)이 성 마테우스 교회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11월 8일에는 사찰 음식을 세계에 알린 정관(Jeong Kwan) 스님이 이 교회에서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화합의 만찬을 선보였다. 이어 김금화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경계와 유토피아, 정치와 예술’이라는 주제 아래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퍼포먼스를 펼쳤다. 프로젝트가 연장되면서 세 사람은 북한 식물을 확보하는 데 계속 힘을 쏟고 있다. “북쪽의 꽃을 심고 싶다고 했을 때 다들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방문객들에게 선사하는 게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우리는 올해도 계속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예술 정원에서 남북한 사람들이 모여 막걸리라도 한 잔씩 하면서 어떤 이야기든 나누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석현 작가의 말에는 간절함과 결연함이 배어 있었다. 김금화 큐레이터는 “남북 대화가 진척되어 이 정원에서 남북 생태학자들이 심포지엄을 열고 백두대간의 식물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소망했다.

화해와 통일의 일꾼을 키운다

Tales of Two Koreas 2019 WINTER

화해와 통일의 일꾼을 키운다 탄광촌으로 알려진 강원도 태백시에서 대안학교와 수련원을 통해 통일 이후를 살게 될 미래 세대를 키우고 있는 미국인 신부가 있다. 4대째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는 벤 토레이(Ben Torrey) 신부다.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Reuben Archer Torrey Ⅲ) 가 세운 수도 공동체에서 기도와 노동을 통해 젊은 인재를 교육하고 있는 그에게 통일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곧 다가올 현실이다. 벤 토레이 신부는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의 한국 이름 ‘대천덕(戴天德)’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대영복(戴永福)’으로 지었다. 그는 2005년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이주했으며, 현재 ‘네 번째 강(Fourth River)’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통일 이후 세대를 가르치고 있다. 태백에 있는 삼수령은 세 물줄기가 동·서·남해로 흘러가는 출발지다. 해발 920미터인 이곳에 내리는 비가 북서쪽 경사지로 흘러내리면 한강이 되어 서해로 가고, 남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동쪽으로 떨어지면 삼척의 오십천으로 흘러 동해로 빠진다. ‘바람의 언덕’이라 불리는 삼수령 골짜기에서 미국인 신부가 북한 쪽으로 흘러가는 네 번째 강을 만들고 있다. 대를 이어 한국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 벤 토레이 신부는 북한 개방에 대비해 이곳에 ‘통일 세대’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삼수령센터(Three Seas Center)를 세워 ‘네 번째 강(Fourth River)’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강원도 태백시에 위치한 삼수령센터 3층 예배실에서 벤 토레이 신부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벤 토레이 신부가 학생들에게 동해와 서해, 남해로 갈라져 흐르는 물줄기의 시작점인 ‘삼수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통일 한국을 위한 인재 양성 ‘네 번째 강’ 프로젝트는 ‘생명의 강 학교(The River of Life School)’와 ‘삼수령 청소년수련원(Three Seas Youth Center)’이 두 축을 이룬다. 2010년에 개교한 생명의 강 학교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대안 학교로 청소년들을‘화해와 통일의 일꾼(agents of reconciliation and unification)’으로 키우는 데 역점을 둔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경쟁 대신 협동과 섬김의 중요성을 배운다. “지구촌의 교육은 대부분 경쟁 체제잖아요?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은 더욱 심하죠. 앞으로는 경쟁의 승자가 아니라 남의 고통을 이해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 뒤처진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는 개방된 북한이나 통일 한국을 현실로 맞이하게 될 겁니다. 경쟁적 교육만 받은 세대는 이러한 과업을 감당하기 힘들어요. 우리는 경쟁보다는 협력의 정신과 협력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남북 통일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가 협력이니까요.” 토레이 신부의 부인 리즈 토레이(Liz Torrey)가 교장을 맡고 있는 이 학교는 중고교 정규 교과목과 더불어 북한에 관한 교육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남북한의 언어 차이, 역사, 사회 제도 등을 망라한다. 그래서 도서실에는 북한 관련 책들이 빼곡하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뿐만 아니라 노동도 해야 한다. “노동이 곧 기도이며,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성 베네딕트 수사의 가르침에 따라 교과 과정에 노동이 필수로 들어 있다. 학생들은 매주 수요일 아침 토레이 신부의 거처이자 기독교 초교파 수도공동체인 예수원(Jesus Abbey), 생명의 강 학교, 삼수령청소년수련원, 삼수령목장(Three Seas Ranch)에서 의무적으로 여러 가지 노동을 한다. 청소, 원예, 잡목이나 잡초 베기, 목초 파종, 외양간 청소, 세탁 같은 것들이다. 토레이 신부의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 신부가 산림청으로부터 임차한 50만㎡가량의 목장과 공동체 마을 곳곳이 자연, 인간, 노동이 어우러지는 교육 현장이다. 토레이 신부도 직접 도끼를 들고 땔감 장작을 팬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서로 협력하는 법을 배운다고 믿는 그는 “10대 시절 아버지와 함께 4년 동안 예수원 건물을 지을 당시에도 장작을 팼다”고 회상했다. 토레이 신부는 생명의 강 학교에서 여름철 1주일 동안 다른 학교 학생들을 위해 노동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 역시 북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북한 개방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의 일환이다. 학생들은 이 기간 동안 휴대전화를 학교에 맡겨야 한다. 토레이 신부는 이 학교를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기숙사가 달린 교사 건물을 짓고 있다. 노동을 통한 협력 삼수령 청소년수련원은 중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영성과 체력을 동시에 키울 수 있는 포괄적인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품성 개발과 섬김으로 청년들에게 남북 통일을 준비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강력한 통일 국가로 세계 무대에서 자리 잡기를 기대하고 있는 이때 젊은이들을 이 나라가 요구하는 지도자로 준비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남한은 총명한 젊은 인재들의 보고이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북한 청년들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고 교육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통일이 되더라도 사회 통합 과정에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 즉 세계관이나 가치관, 문화, 언어 등의 차이에서 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동서독의 통일 과정과 철의 장막 붕괴를 통해 우리가 배운 바와 같이 이런 문제들은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해야 합니다. ‘네 번째 강’ 계획은 바로 그러한 일을 위한 것입니다.” 삼수령목장은 통일이 되면 소 키우는 기술로 북한 주민의 경제 활동을 돕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또한 예수원에서는 이곳을 집처럼 여기는 60여 명이 공동체 생활을 한다. 매주 월~수요일에는 2박 3일 일정으로 예약한 방문객들이 머물다 갈 수도 있다. 이들은 더불어 일하고 함께 밥을 먹으며, 하루 3번 이상 묵상을 한다. 기도도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 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이들도 휴대전화를 예수원 측에 맡겨야 한다. 이런 방문자가 매달 150~400명에 이른다. 이곳은 전액 후원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숙박비는 없다. 물론 신앙심과 형편에 따라 헌금을 할 수는 있다. “자라나는 세대는 개방된 북한이나 통일 한국을 현실로 맞이하게 될 겁니다. 경쟁적 교육만 받은 세대는 이러한 과업을 감당하기 힘들어요. 우리는 경쟁보다는 협력의 정신과 협력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남북 통일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가 협력이니까요.” 간절한 소명 토레이 신부가 ‘네 번째 강’ 계획에 착수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2002년 8월 ‘대천덕(Dae Chon-dok 戴天德)’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더 알려진 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였던 집사가 어머니 제인 토레이(Jane Torrey)에게 전해 달라는 말씀이 있었다. “에덴동산에는 흐르는 강이 4개 있는데, 삼수령엔 강이 3개밖에 없어요.” 토레이 신부는 즉각 이 말에 담긴 뜻을 이해했고, 예수원에 네 번째 강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강은 북쪽을 향하는 생명수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버지가 통일을 준비할 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수련원 설립을 놓고 20여 년간 기도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활 터전이 있던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살면서도 꾸준히 생명의 강 학교와 삼수령 청소년수련원 설립을 돕고 있었던 토레이 신부에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일상생활 도중에도 문득 북한의 어려운 상황이 생각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잦았다. 불현듯 아버지 장례식 때 들었던 ‘네 번째 강’ 이야기가 떠올랐다. 북한 개방에 대비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그는 2003년 태백 예수원 공동체에 합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명의 간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백 예수원 공동체는 곧 그를 삼수령센터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2005년 한국으로 완전히 이주해 이곳에 정착했다.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벤 토레이 신부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지만, 7살부터 19살 때까지 한국에서 자랐다. 그는 한국 청년 10명과 함께 아버지가 1965년 태백에 예수원을 건립할 당시 첫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6개월 동안 대형 군용 텐트에서 지내며 일을 도왔다. 예수원 설립 장소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던 그의 아버지는 태백 지역 성공회로부터 이곳 얘기를 듣고 땅을 구입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1969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76년 뉴욕 주 사라 로렌스 대학(Sarah Lawrence College)을 졸업한 후 2년 동안 지역 사회 봉사단체를 이끌다가 1978년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와 예수원에서 1년을 보냈다. 이때 그는 삼수령 지역의 일부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계속 살 생각은 없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79년부터 에트나 생명보험회사(Aetna Life and Casualty)와 앤더슨 컨설팅(Andersen Consulting)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시스템 개발자 등 IT 전문가로 일했다. 1994년 코네티컷 주에 미션스쿨인 킹스스쿨(The King’s School)을 설립해 2004년까지 이사장과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삼수령센터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예수원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 신부가 1965년 설립한 기독교 초교파 수도 생활 공동체이다. 현재 벤 토레이 신부의 숙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4대째 이어온 인연 토레이 가문은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 토레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1세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20세기 초 한국을 방문해 교회 활동에 도움을 주었다. 할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2세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교회의 재활 운동을 위해 일했다. 아버지 루벤 아처 토레이 3세 역시 한국에서 성공회 사역자로 활약하면서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가엘신학원을 재건립했고, 태백에 예수원을 설립하고 삼수령센터의 터전을 닦은 후 이곳에서 영면에 들었다. 토레이 신부 가족은 대대로 기독교 초교파 정신을 소중히 지켜왔다. 증조할아버지가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會衆敎會) 목사, 할아버지는 장로교 목사, 아버지는 성공회 신부, 토레이 신부 자신은 미국 동방교회(The Syro-Chaldean Church) 소속이다. 올해 5월 삼수령센터 공동체 마을 증설 공사를 시작한 토레이 신부는 ‘네 번째 강’ 프로그램을 확장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주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은 한국 교회와 사회가 모두 분열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일이다. 그는 힘주어 말했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한 사회부터 먼저 하나가 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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