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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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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4

[전시물로 보는 아세안] 제1기 상설전시 '아세안을 잇다, 아세안을 엮다'의 전시품 아세안문화원 제1기 상설전시 ‘아세안을 엮다, 아세안을 잇다ʼ를 통해 선보였던 아세안 각국에서 기증한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인형 미얀마 전통 공연에 사용되는 끈이 달린 마리오네트 인형 왕실 견습 소년 미얀마의 전통 인형극 욕테(Yoke Thay)의 한 장면으로, 왕실 견습소년을 연기하는 무용수와 마리오네트 불상과 의례용품 신성함, 영적인 평안, 성스러운 보호 그리고 행운을 상징하는 불상 신성한 실 종교행사에서 승려와 불상을 연결하거나, 가정과 개인에게 축복을 비는 용도로 사용되는 실 뚱 (전통 란나깃발) 태국 북부지방의 종교의식 또는 축제에 사용되는 전통적인 란나 스타일의 직물 배너 징과 채 태국 전통 음악에 사용되는 금속으로 만든 징, 컹(Kong) 까틴 의식에 사용되는 물품 까틴 의식에 앞서 태국 불교 사원을 돕기 위한 구호품과 물품들을 요청하는 데 사용되는 막대 나무 물고기 모양 모빌 태국 중부지방에서는 바나나잎 또는 야자수잎으로 물고기 (쁠라 따피안) 모양 모빌을 만들어 아기의 건강과 축복을 기원합니다. 승려복 태국 불교에 입문하는 수도승들이 수계의식에 반드시 지참해야 하는 탁반에 올린 샤프란 색의 승복 밤색 옷감 수계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주는 다양한 종류의 사례 물품 중 하나인 밤색 승복 끄라통 러이 끄라통 축제 기간에는 바나나잎으로 만든 바구니배인 끄라통에 꽃과 향, 초를 채워 강에 띄워 보냅니다. 쏭끄란 세트 쏭끄란 축제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로 전통 향수와 꽃잎을 뿌린 물을 불상에 부어 먼지를 씻어냅니다. 피따콘 가면 미니어쳐 피따콘 축제 기간에는 사람들이 형형색색의 의상을 입고, 찹쌀을 찔 때 사용하던 오래된 대나무 바구니로 만든 가면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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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7

동남아시아의 공양구, 삼보에 대한 공경을 담다 미얀마 꼰바웅 왕조 대 민돈(Mindon) 왕의 보시, 19세기 말 ⓒ영국 도서관 글 김미소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동이 트기 전 이른 아침, 주황색의 가사를 갖춰 입고 한쪽 어깨에 발우를 멘 승려들이 경전을 외며 맨발로 천천히 걸으면, 길을 따라 늘어선 신도들이 각기 정성스럽게 준비해 온 공양물을 승려의 발우 안에 넣는 광경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는 국민의 대다수가 상좌부 불교신자인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와 같은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탁발’ 수행입니다. 탁발(托鉢, Tak bat)이란 ‘발우를 받쳐 든다’는 의미로, 승려들이 의식(衣食)을 해결하기 위해 발우를 들고 집집마다 동냥을 구하며 수행하던 오랜 불교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탁발은 승려의 개별적인 수행의 의미를 넘어서, 상좌부 불교 신자가 일상에서 공덕(Merit)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즉, 상좌부 불교도들은 승려에게 옷가지와 음식 등을 보시함으로써 자신의 공덕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상좌부 불교에서 공덕을 쌓는(Merit-making)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는 개별적인 수행을 통한 해탈을 강조하는 상좌부 불교의 종교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미얀마 공양구, 19세기, Sylvia Faraser Lu, 2000, Vision from the Golden Land. (Illinoi: Art media Resources, Ltd.) p. 201. Figure. 156. 상좌부 불교에서는 현재의 삶이 과거의 업에 의한 결과이며, 현세에서 축적한 공덕의 정도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미래는 이와 같이 업에 의해 윤회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해탈(Nirvana)에 이르는 것이었지요. 공덕을 쌓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동은 불교의 세 가지 보물(三寶, Triple gems)인 불법승(부처, 교법, 승려)에 대한 공경과 이에 대한 보시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신도들은 탁발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승려들이 거처하는 승원이나 불상을 모신 사원에 필요한 각종 물품과 음식을 보시함으로써 자신의 공덕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한편 동남아시아 전통 왕조 시대에 ‘보시’는 종교적 의미에 한정되지 않고, 유력자의 위세를 드러내는 척도로 기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왕이나 귀족들은 정기적으로 사원과 승원에 대규모의 공양품(offering)을 보시하여 간접적으로 자신의 위세를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그림 1). 즉, 공양품의 종류와 양이 많을수록 이를 보시한 자의 권세 정도를 추정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를 수용한 왕조를 중심으로 공양품을 담는 공양구 제작이 자연스럽게 발전하였습니다. 공양구는 공양품을 담는 그릇으로의 본연의 기능을 넘어, 불법승에 대한 공경과 지극한 불심에 대한 시각적 발현으로 여겨졌습니다. 공양구는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모두 발견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각 국가별로 선호했던 미감에 따라 공양구의 형태와 특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태국 공양구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미얀마에서는 공양구를 숭옥(Hsun ok)이라는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숭옥은 대나무 껍질로 만든 뼈대에 칠과 장식을 더해 완성했습니다. 미얀마의 최후 왕조인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대에 대에 제작된 숭옥은 미얀마만의 특징이 가장 잘 반영된 공양구로 평가받습니다(그림 2). 미얀마 숭옥만의 독특한 특징은 마치 불탑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뚜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공양구는 칠 위에 금박을 붙이고, 그 위에 색유리와 대나무 줄기 등으로 화려한 장식을 첨가했다는 점에서 왕실 주문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국의 공양구는 형태와 재료 면에서 매우 다양한 특징을 보입니다. 19세기에 제작된 한 공양구는 금 위에 연꽃 문양을 양각한 접시가 스탠드 위에 올려진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그림 3). 강렬한 주홍색상과 표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문양, 금박을 통해 이 공양구 하나를 제작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이 들어갔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라오스 공양구 라오스의 전통적인 공양구는 20세기 중엽 라오스 왕국의 왕이었던 시사방 봉(Sisavang Vong, r. 1946-1959) 재위시기에 발행된 지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그림 4). 이 공양구는 현존하지 않아 제작에 어떤 재료가 사용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형태면에서는 태국의 공양구와 다소 유사하지만, 크기가 다른 두 개의 공양구를 상하로 올려놓은 점과 상단에 나가(Naga) 장식을 배치한 것은 라오스 공양구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캄보디아 공양구는 미얀마와 유사하게 대나무를 이용한 칠기로 제작되었습니다. 이외에도 목재, 은, 코끼리의 상아를 감입하여 장식 문양을 넣은 독특한 공양구들도 발견됩니다. 캄보디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19세기경의 공양구는 칠 위에 색유리로 장식 문양을 넣었습니다(그림 5). 장식 패턴은 방형으로 구획을 나눈 후, 여기에 격자 무늬를 그리고, 그 안에 꽃장식 패턴을 채워 넣어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이처럼 상좌부 불교를 신앙하는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공양구에는 각 국가만의 개성과 미감이 잘 드러납니다. 공양구의 형태는 다채롭지만,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현세에서의 공덕을 쌓기 위한 동일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캄보디아 공양구 ⓒ캄보디아 국립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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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6

[전시물로 보는 아세안] 제1회 상설전 '아세안을 엮다, 아세안을 잇다' 전시품 아세안문화원에서는 상설전 ‘아세안을 엮다, 아세안을 잇다ʼ를 통해 아세안 각국에서 기증한 작품들을 전시하였습니다. 하프 퓨 시기(BC2세기~AD10세기)에 유래한 ‘사운(Saun:)’이라 불리는 미얀마의 하프 실로폰 잉와 시기(AD14~16세기)에 소개된 미얀마 실로폰인 파탈라 드럼 즐거운 행사에서 전통 피리, 심벌즈, 죽비와 함께 연주되는 미얀마의 민속 북 하누만 가면 하누만은 흰색 원숭이로, 악마와의 전투에서 라마의 부대를 이끄는 통솔자입니다. 쑤크립 가면 쑤크립은 주홍색 원숭이로, 머리장식 꼭대기가 뒤로 구부러져 있고 단검을 무기로 쓰는 것이 특징인 라마의 주요 병사입니다. 마이야랍 가면 마이야랍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보라색 악마로, 지하세계의 통치자 역할을 합니다. 톳싸깐 가면 톳싸깐은 열개의 얼굴과 스무개의 팔을 가진 초록색 악마로, 원래 악마를 지키는 천사였으나 비슈누신과의 불화로 인해 악의 우두머리로 환생하였습니다. 초와 선향 세트 명예와 존경의 의미로 국왕, 귀족 그리고 원로에게 제공되는 초와 선향 세트 벤자롱 도자기 코끼리 태국의 국수(國獸)로, 태국 문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상징물인 코끼리를 본떠서 만든 도자기 태국 전통 공연단 예부터 태국 어린이들은 ‘쭉’이라는 머리모양을 하는데, 열 또는 감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행해졌습니다. 태국 알파벳 포스터 태국의 람캉행 대왕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1283년 최초의 태국 문자를 발명했습니다. 머라이언 석고 조각상 사자의 도시로 불리는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상징인 머라이언의 형태를 본떠서 만든 조각상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액자 싱가포르의 대표 명소인 마리나 베이 호텔을 담은 나무 조각 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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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10

아세안의 다양한 취향을 반영한 “끈디(Kendi)” 글 김미소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부조(김미소 촬영) <사진 2> 캄보디아 바욘 사원 부조(김미소 촬영) 끈디(Kendi, spouted water bottle)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흔히 사용된 독특한 기형의 물병입니다. 일반적으로 끈디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물병은 손잡이 역할을 하는 긴 목, 두 개의 주구(注口), 납작한 몸체와 같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끈디는 고대부터 꾸준히 사용되었으며, 대륙부와 도서부 동남아시아를 포괄하는 전 영역에서 제작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끈디는 토기(Pottery), 도기(Earthware), 자기(Glazed ware), 금속공예(Metal ware) 등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끈디의 어원은 고대 인도의 정병(淨甁)인 쿤디카(Kundika)에 있습니다. 인도에서 쿤디카는 수행자가 휴대하던 물병이었으나, 종교의 발전과 함께 의례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힌두교와 불교가 동남아시아로 전래되면서 종교와 관련된 물질 문화도 함께 유입되었고, 쿤디카도 이 과정에서 동남아시아로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말레이-인도네시아인들에게 쿤디카는 끈디로 불리게 되면서 점차 고유명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 끈디는 종교 의례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용으로도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고대 사원 유적의 부조나 벽화에서는 끈디를 사용하는 천인(天人, Devata)이나 일반 사람들의 모습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사진 1~2). 사용 계층과 목적에 따라 끈디의 제작 수준은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종교 의례나 왕실에서 쓰이는 끈디는 고품질의 선별된 태토(胎土, Clay)를 사용하여 번조되었기 때문에 튼튼하고 내구성이 강합니다. 일상생활용 끈디는 실용성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태토가 조야하고, 깨지기 쉽지만 나름대로의 소박한 멋이 있습니다. Dawn Rooney. 2013. Ceramics of Seduction: Glazed Wares from South East Asia. (Bangkok: River Books) 도판 참고 동남아시아에서 끈디의 발전은 크게 기원 후 10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0세기 이전의 끈디는 대부분 점토를 빚은 뒤 구워서 제작한 도기(陶器)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10세기 이후의 끈디는 중국에서 전해진 선진 기술을 수용하여, 선별된 양질의 점토로 만든 토기에 유약을 발라 고온에서 구워 완성하는 자기(磁器)로 발전하였습니다. 자기의 생산은 흔히 흙, 불, 기술의 삼요소가 모두 갖춰졌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말해집니다. 동남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자기가 대량 생산된 시기는 14~15세기 이후이며, 기술이 보편화되는데 적어도 3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로 제작된 끈디는 흥미롭게도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국가에서만 제작되었습니다. 중국과 가장 근거리에 위치하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았던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자기를 생산한 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트남은 끈디를 청화백자(Blue and white porcelain)로 제작하여, 역으로 중국과 도서부 동남아시아 등지에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의 끈디는 유교의 영향으로 봉황, 사자, 기린, 용과 같은 서상(瑞像, Auspicious symbol)이나, 당초문, 국화문과 같이 중국 도자에서 자주 사용되는 문양이 선호되었습니다(사진 3). 태국과 미얀마의 끈디는 동남아적인 문화를 반영하여 중국의 도자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 두 국가에서는 진한 녹색 빛을 띠는 청자나, 초콜릿과 같은 진한 갈색 빛을 띠는 갈유도자로서의 끈디가 다량 제작되었습니다. 이는 청화 안료보다는 상대적으로 값이 싼 녹유와 갈유를 사용하여 도자를 제작했기 때문이라 설명됩니다. 태국과 미얀마의 끈디는 기형(器形)의 측면에서도 독특한 문화적 변형이 보여집니다. 코끼리 모양 끈디와 공작 모양의 끈디는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이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사진 4). Dawn Rooney. 2013. Ceramics of Seduction: Glazed Wares from South East Asia. (Bangkok: River Books) 도판 참고 한편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끈디는 16세기까지도 도기로 제작되다가 19세기부터는 황동(Brass)과 은(Silver)을 이용한 금속공예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금속공예로 발전한 끈디는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술탄(Sultan)의 권위를 상징하는 표상(Regalia)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말레이시아 이슬람 예술 박물관(Islamic Arts Museum Malaysia)에 소장된 19세기 금속제 끈디들은 자기에 비해 크기가 크고, 기형도 매우 다양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끈디의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반복적인 패턴을 이루며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슬람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여집니다. 이처럼 동남아시아의 끈디는 외부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다시 독창적으로 변화시키는 동남아시아의 유연한 문화적 특징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적 배경이 반영된 끈디를 통해 동남아시아 각국의 미적 취향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슬람 예술 박물관 끈디 컬렉션 (김미소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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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10

[전시물로 보는 아세안] 베트남 고대 청동기 문화의 상징, 동선 청동북 주한베트남대사 응웬 부 뚜가 기증하여 아세안문화원 상설전시관에 전시되었던 동선 청동북 모습 동선 청동북은 기록이 없던 선사시대 베트남인들의 세계관과 자연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재입니다. 북부 베트남의 홍 강 삼각주(Red River Delta) 유역에서 번창하였던 선사 청동기 시대 문화인 동선문화에 의해 제작된 이 청동북은, 기원전 600년경에서 3세기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동선 청동북은 베트남 동선문화의 금속 유물 중 가장 뛰어난 예라고 할 수 있는데요. 동선북에는 중앙의 태양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새, 배를 타는 사람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등 다양한 장식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선사시대 베트남인들의 삶에 대해 추적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배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동선북을 만들었을 당시 무역의 중요성을 상징하며, 이 북이 무역과 보물의 대상이었던 것을 나타냅니다. 한편, 동선북은 처음에는 악기의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선북은 사람을 모으거나 의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구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동선북은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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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5

하노이의 천년 고찰, 쭈어 못 꼿(Chùa Một Cột) 글 김미소 베트남의 오래된 불교 사찰, 쭈어 못 꼿 베트남의 천년 고도 하노이(Hanoi)에 위치한 쭈어 못 꼿(Chùa Một Cột)은 베트남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불교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사진 1). 이 사찰은 11세기 베트남 리 왕조(Ly Dynasty)의 2대 왕인 리 타이 똥(李太宗, Lý Thái Tông, r. 1028-1054)이 1049년에 조성하였습니다. 쭈어 못 꼿은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리 왕조 시대에 정기적인 의례가 행해지던 중요한 왕실 사찰이었습니다. 리 왕조 이후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쭈어 못 꼿은 왕실의 후원으로 여러 차례 재건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쭈어 못 꼿은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다가, 이듬해인 1955년에 복원된 모습입니다(사진 2). 쭈어 못 꼿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자를 사용하는 유교 문화권인 베트남에서 쭈어 못 꼿은 이름 그대로의 의미를 따라 숫자 하나를 뜻하는 “못(Một)”, 기둥을 뜻하는 “꼿(Cột)”, 사찰을 뜻하는 “쭈어(Chùa)”가 합쳐져 일주사(一柱寺, One Pillar Temple)라 한역됩니다. 쭈어 못 꼿의 조성 배경에 대해서는 리 타이 똥의 꿈 이야기와 관련된 신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리 타이 똥이 꿈에서 연못 위에 놓인 연화대좌에 앉아 자신을 초대하는 관음보살(Avalokiteshvara)을 보았고, 이를 불길하게 여긴 왕은 깨어나자마자 선승을 불러 꿈에서 본 광경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선승은 왕이 꿈에서 보았던 연못 위에 피어난 연꽃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사찰을 조성하였고, 이곳에서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법회를 열었다고 전해집니다. 따라서 쭈어 못 꼿은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연우사(延祐寺, Diên Hựu tự Longevity Temple)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은 쭈어 못 꼿을 “연꽃 모양의 기둥”이라는 이름의 연화대(蓮花臺, Liên Hoa Đài)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쭈어 못 꼿은 방형(方形)의 연못에 원통형의 석조 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목조 전각이 올려진 독특한 건축 형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둥 위에 사당을 올린 건축 형식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베트남 리 왕조 불교건축만의 독자적인 특징입니다. 특히, 쭈어 못 꼿의 기둥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힌두교 쉬바(Siva)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링가(Linga)가 불교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변형되어 나타난 독창적인 산물로 보거나, 불교의 정토사상에 근거하여 전각은 연꽃을 상징하고 이를 받치고 있는 기둥은 연꽃의 줄기를 표현한 것으로 보는 여러 견해가 존재합니다. 1896년 쭈어 못 꼿의 모습 기둥 위에 올려진 목조 전각은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뻗어 올라간 지붕의 형태가 인상적입니다. 이처럼 지붕의 끝이 마치 꽃잎처럼 부드럽게 말아 올라가도록 처리하는 형식은 하노이의 전통 건축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입니다. 쭈어 못 꼿 지붕 상단에는 불꽃 모양의 석조 장식을 중심으로 용 두 마리가 서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사진 3). 석조 장식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고, 중앙에 붉은 색의 원이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달”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 마리의 용은 음(陰, yin)과 양(陽, yang)의 조화를 상징합니다. 베트남의 전통건축에는 중앙에 달과 쌍룡이 한 세트를 이루어 지붕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베트남의 오랜 신화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베트남에서 용의 표현은 주목할 만합니다. 용은 베트남 선사 시대의 대표 유물인 동고(銅鼓)에서부터 19세기~20세기 중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대의 건축과 미술에 꾸준히 등장할 정도로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신성시했던 수호신이었습니다. 용은 강우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고대 왕조에서 상서로운 영물로 여겨졌습니다.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였던 베트남에서도 용은 신앙의 대상이자, 길조와 권위를 상징하였습니다. 쭈어 못 꼿 지붕 상단의 석조 장식 11세기 리 왕조 대에 이르러 용의 상징적 의미는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가령 리 태조(李太祖, Lý Thái Tổ, r. 1009?-1028)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탕롱(昇龍, Thăng Long), 즉 오늘날의 하노이를 새로운 수도로 선택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리 왕조 대 불교가 크게 발전하면서 용이 가지는 상징성은 종교와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용은 불법의 수호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관음보살을 도와 중생을 정토(淨土, Pure land)로 인도하는 역할로 등장하며 종교적 의미가 강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쭈어 못 꼿의 지붕에 표현된 용은 단순히 음양의 조화를 위한 상징이기보다는 전각 안에 모셔진 관음보살상과 함께 정토 사상을 나타내는 종교적 상징으로서 성격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쭈어 못 꼿은 “베트남 국보 1호”로 자주 소개되고 있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베트남 정부는 차수 별 법령에 따라 국보를 분류하고 있지만, 쭈어 못 꼿은 현재까지 총 일곱 차례 제정된 국보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쭈어 못 꼿은 베트남인들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원으로 인식되며, 이곳에서 예불을 드리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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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8

[전시물로 보는 아세안] 동남아시아인들의 대중적인 기호품, 베텔(Betel) 아세안문화원 2층 상설전시관에 전시되었던 ‘벤자롱 베텔 세트 (Benjarong Betel Set)’ 동남아시아를 방문하면 동남아시아인들이 나뭇잎 뭉치로 보이는 것을 껌처럼 질겅이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남아의 대표적인 토착 문화인 ‘베텔 씹기(betel chewing)’ 문화입니다. 베텔은 구장목(betel vine) 또는 그 잎을 지칭하나, 일반적으로는 구장 잎에 빈랑목(areca palm) 열매 조각과 생석회, 향료 등을 넣어 둥글게 싼 씹는 담배를 나타냅니다. 동남아에서는 일반적으로 구장 잎 표면에 석회반죽을 바른 후 그 위에 빈랑열매 조각이나 씨앗을 얹어 둥글게 싸는 과정을 통해 베텔을 만듭니다. 수 천년동안 지속되어온 동남아의 베텔 씹는 문화는 베텔을 만드는 기본재료들을 담는 용기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작된 베텔 씹기 세트는 평민과 궁전의 신하, 왕족 등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벤자롱 베텔 세트는 왕족의 베텔 씹기를 위한 도구와 재료를 담는데 쓰인 태국 채색 도자기 세트입니다. 모든 도구를 나르는 데 쓰이는 큰 쟁반 하나와 구장 잎을 담는 케이스, 빈랑열매 및 적색 석회 반죽 등 각각의 재료를 담는 작은 상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벤자롱 베텔 세트는 원래 왕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도 쓰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베텔을 만드는 데 쓰이는 빈랑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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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7

걸어서 중생 속으로, 수코타이 시대의 부처유행상 글 김미소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부처유행상, 14세기, 수코타이 시대, 태국 사완카 워라나욕 박물관 ‘행복의 여명’이라는 의미의 수코타이(Sukhothai)는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타이족들이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13세기경 태국 중북부 일대를 중심으로 성립된 왕조입니다. 스리랑카와 이웃 왕조인 미얀마에서 전해진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를 기초로 정치적 안정을 마련한 수코타이 왕실은 공덕을 쌓기 위해 대규모 사원을 건설하고, 다량의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수코타이 시대는 대륙부 동남아시아에 있어 타이족의 문화적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태국어의 모체가 되는 타이어와 타이 문학, 타이 도자기가 이 시기에 발전하였고, 타이족 특유의 미적 감각이 반영된 불상들도 조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걷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듯한 불상인 부처유행상(佛陀遊行像, Walking Buddha Statue)도 바로 수코타이 시대 타이인들에 의해 만들어져 이후 상좌부불교의 중요한 종교적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태국 수코타이의 사완카 워라나욕 국립 박물관(Sawankha woranayok National Museum)에 소장된 높이 1.54m의 청동불상은 수코타이 시대를 대표하는 부처유행상입니다(그림 1). 전면에서 보면 이 불상의 허벅지까지는 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무릎 아래에서 두 다리를 교차하여 표현한 모습이 마치 걷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것처럼 보입니다. 불상의 동적인 모습은 측면에서 더욱 잘 드러납니다. 부처님의 얼굴은 뒤로 빠져 있는 어깨와 대비되어 마치 앞으로 향하고 있는 듯한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또한 오른쪽 발꿈치를 살짝 들고, 몸의 무게 중심을 왼쪽 다리에 실으면서 걷고 있는 듯한 자세를 표현해냈습니다. 부처님의 오른쪽 어깨에서 살짝 들고 있는 발꿈치까지 둥근 활모양을 그리며 신체의 곡선감과 유연성을 강조한 점도 태국 불상에서 보이는 독특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외에도 수코타이 시대의 부처유행상에서는 타이족이 선호한 부처님의 미적인 측면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그림 2). 이는 긴 계란형의 얼굴, 부처님의 정수리 위에 혹처럼 솟아 있는 육계(usnisha) 위로 부처님의 지혜와 에너지를 상징하는 불꽃이 표현된 점, 얇고 기다란 귀, 연꽃봉오리를 연상시키는 길고 유려한 손은 수코타이 왕조때부터 타이인들의 선호로 인해 불상의 중요한 특징으로 정착되었습니다. 14~15세기, 수코타이 시대, 태국 람캄행 국립 박물관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불교 미술을 연구한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은 수코타이 시대 불상의 다리에서 보이는 고유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첫째, 영양(Gazel)과 같은 종아리, 둘째, 바나나 나무처럼 두꺼운 허벅지, 마지막으로 안으로 무릎이 굽은 소위 안짱다리(knock-kneed)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렇다면 14세기 수코타이 시대에 ‘걷고 있는 모습’의 불상은 왜 조성되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는 석가모니의 생애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전의 내용을 기초로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견해는 큰 틀에서 ‘걷는 행위’가 가지는 불교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특히 태국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발자국(footprint)은 오늘날까지 그 자체로 숭배의 아이콘이 될 정도로 진귀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지상 위에 한 발 한 발 걷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을 3차원의 조각으로 표현한 것은 불법의 전파를 의미할 수도 있고, 중생을 위해 천계로부터 강림하신 부처님의 자비심에 대한 강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부처유행상의 등장과 관련한 이유에 대해 합리적 추론을 해볼 수 있습니다. 13세기의 대륙부 동남아시아는 영토 확장을 위한 끊임없는 내전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합니다. 수코타이의 세 번째 왕이었던 람캄행(Ram Khamhaeng, r. 1279?~1298)은 현재 태국의 영토와 유사한 규모의 영토를 차지할 정도로 대단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차례의 전쟁 속에서도 람캄행은 불교에 대한 신앙으로 스리랑카의 승려들을 왕실에 초청하여 불법의 전파를 꾀했습니다. 지속된 내전 속에서 불교는 타이인들의 신앙적 의지처가 되었고, 불법의 확산 또한 대규모 영토를 다스릴 수 있는 왕실의 중요한 정책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탄생한 부처유행상은 타이인들의 세계에 강림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존재를 미술로 표현하고, 불법의 전파가 가지는 추상적인 의미를 더욱 효과적으로 가시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수코타이 시대의 타이인들은 부처유행상을 보며 심리적인 위안을 얻고, 석가모니의 모습처럼 불법을 따라 걷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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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5

[전시물로 보는 아세안] 브루나이 다루살람의 틴둘랑 자줏빛, 초록빛 등으로 염색된 판단 잎으로 엮은 틴둘랑은 브루나이의 대표적인 전통 공예품입니다. 브루나이에서는 투둥 둘랑(Tudung Dulang)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같은 제목의 노래가 있을 정도로 브루나이인들에게 친숙한 공예품입니다. 틴둘랑은 브루나이 수도 반다르스리비가완에서 남서쪽으로 17km 정도 떨어진 센쿠롱(Sengkurong)과 탄중 낭카(Tanjung Nangka)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알록달록한 색, 그리고 밥공기를 뒤집어놓은 것만 같은 모양 때문에 처음 본 이들은 어부들이 머리에 쓰는 씨라웅(Siraung)과 헷갈려 하지만, 본래 용도는 접시덮개입니다. 음식을 담은 그릇 위에 덮어두어 파리와 같은 벌레들이 음식에 꼬여드는 것을 막아줍니다. 시대가 지나고 주거환경이 달라지면서 틴둘랑의 역할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이들에게는 틴둘랑은여전히 접시덮개로 활용되고 있지만, 비교적 벌레들로부터 자유로운 주거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은 틴둘랑을 벽에 걸어 집안을 장식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틴둘랑은 다양한 색과 패턴들을 가지고 있는데,브루나이 여성들이 들과 바다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엮기 시작했기에, 브루나이의 가족들의 수만큼 다양한 틴둘랑이 만들어져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틴둘랑은 브루나이의 단순한 접시덮개가 아닌, 브루나이의 일상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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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8

뇨냐(Nyonya)는 까숫 마넥(Kasut manek)을 신는다: 싱가포르의 페라나칸(Peranakan) 뇨냐 패션(Nyonya Fashion) 글 김미소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싱가포르는 다양한 민족들의 공존을 통해 형성된 매력적인 혼성 문화를 가지고 있는 국가입니다. 싱가포르의 다채로운 문화 구성에 있어 페라나칸(Peranakan)은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페라나칸은 넓은 의미에서 15세기 이후 해상 무역을 위해 도서부 동남아시아 일대로 이주한 다양한 민족들과 현지인의 혼인 관계를 통해 태어난 후손들을 말합니다. 특히 싱가포르의 페라나칸은 남중국 출신 이주민과 현지의 말레이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다수이며, 이들에 의해 중국 문화와 말레이 문화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말레이어로 페라나칸 남성은 바바(Baba), 여성은 뇨냐(Nyonya)라고 불립니다. 페라나칸 문화를 설명할 때 “뇨냐 문화(Nyonya culture)”라는 범주가 있을 정도로 뇨냐들은 중국과 현지 문화의 특성을 융합한 페라나칸 문화의 형성 주체였습니다. 뇨냐 문화의 정수는 패션에서 잘 드러납니다. 뇨냐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여성 어른에게 자수, 구슬공예, 바느질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뇨냐 패션은 뇨냐의 손을 거쳐 탄생한 핸드 메이드였습니다. 뇨냐 패션에는 현지의 기후와 사정에 맞추어 변용된 독특한 디자인과 색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선명한 핑크, 하늘, 연두, 노랑색은 뇨냐들이 가장 선호했던 색채로 페라나칸 복식, 도자(porcelain), 자수용품(embroidery crafts)에서 자주 이러한 색상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까숫 마넥(Kasut manek)은 뇨냐 패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숫 마넥은 말레이어로 구슬을 의미하는 마넥(Manek)과 슬리퍼를 뜻하는 까숫(Kasut)이 합쳐진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 까숫 마넥은 작은 구슬들을 꿰어 만든 수제 슬리퍼를 말합니다. 본래 슬리퍼는 열대 기후 속에서 말레이인들이 신던 신발이었지만, 점차 페라나칸 뇨냐 패션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즉, 까숫 마넥은 말레이 문화의 바탕 위에 중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혼합되면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페라나칸 뇨냐들은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가족 행사를 위해 까숫 마넥을 직접 만들거나 주문 제작하였으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뇨냐의 일상 패션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까숫 마넥, 19세기 말~20세기 초, 페라나칸 박물관ⓒ 까숫 마넥의 굽과 형태는 다양하지만, 선호된 색상이나 장식 패턴은 시대적 유행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주목할만한 특징은 발등을 덮는 슬리퍼의 표면 제작 기법과 장식 패턴이 시대에 따라 변화된다는 점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뇨냐들이 신던 슬리퍼는 주로 봉황이나 모란, 용, 화조, 기린 등 중국의 전통적인 길상문양 장식 패턴이 선호되었고, 발등을 덮는 표면도 주로 천 위에 여러 가지 색상의 실이나 구슬로 자수를 놓아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슬리퍼가 바로 싱가포르 페라나칸 박물관(Peranakan Museum)에 소장된 슬리퍼입니다. 여러 가지 색상의 천으로 화면을 분할하고, 그 안에 소형의 금색 구슬로 봉황과 기린, 구름 등의 장식 패턴을 꿰어내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20세기 초에 제작된 까숫 마넥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구슬을 이용하여 슬리퍼 전면에 장식 패턴을 채워 넣는 기술적 발전이 엿보입니다. 또한 장미, 강아지, 앵무새, 작은 소녀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티프들이 장식 패턴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유럽에서 새롭게 유입된 문화적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싱가포르 아시아 문명 박물관(Asian Civilisations Museum)에 소장된 또 다른 두 점의 슬리퍼를 함께 살펴볼까요? 이전 시대의 슬리퍼와 비교해서 슬리퍼 표면을 여러 가지 색상의 구슬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장식 모티프도 서구의 예술적 취향을 반영한 동식물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미 패턴의 까숫 마넥, 20세기 초, 아시아문명박물관ⓒ 작은 소녀와 앵무새가 표현된 까숫 마넥, 20세기 초, 아시아문명박물관ⓒ 이 시기 까숫 마넥 제작에 사용된 다양한 색상의 구술들은 주로 유럽과 일본에서 수입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까숫 마넥의 장식 패턴에서 보이는 변화는 시대적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20세기 이후 까숫 마넥은 싱가포르의 뇨냐뿐만 아니라 현지에 거주하는 외국 여성들도 제작해 신을 정도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수요자의 취향을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장식 패턴과 제작 기법의 변화가 동반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땀 한 땀, 뇨냐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까숫 마넥에는 다양한 민족에 의해 형성된 싱가포르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까숫 마넥은 싱가포르의 혼성 문화를 대표하는 페라나칸 유산(Peranakan legacy)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도 다량 제작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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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6

[전시물로 보는 아세안] 싱가포르의 국화, 반다 미스 자큄(Vanda Miss Joaquim) 반다 미스 자큄 생화 싱가포르에는 3,000여 종의 진귀한 난초를 전시하는 정원인 국립난초정원이 있을 정도로, 난초에 대한 관심이 특별합니다. 또 싱가포르 정부는 자국 방문 귀빈에 대한 환대·예우의 의미를 담아 새롭게 배양한 난초 종에 귀빈의 이름을 붙이는 행사인 난초 명명식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지난 2018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난초 명명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난초는 싱가포르의 국화이기도 합니다. 바로 ‘반다 미스 자큄’이라고 알려진 ‘파필리오난스 미스 자큄 아그네스’입니다. 반다 미스 자큄은 난초의 종류인 반다 테네스와 반다 후케리아나를 결합해서 만들어진 하이브리드 난초입니다. 이름은 난초의 종류와 이 난초를 개발한 아그네스 자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이 꽃은 세계에서 첫 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하이브리드 난초로, 다양한 기후 조건에서 잘 견딜 수 있고 꽃이 잘 피는 것이 특징입니다. 반다 미스 자큄은 1897년 영국왕립원예협회로부터 1등급 인증을 받았으며, 1981년 4월 15일에는 꽃의 아름다움, 강인한 생명력과 1년 내내 꽃이 피는 품질을 인정받아 싱가포르의 국화로 선정되었습니다. 아세안문화원 2층 상설전시관에 전시되었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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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문화유산 10

마리아 클라라 가운(Maria Clara Gown)에 담긴 필리핀 전통 여성 복식 이야기 글 김미소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마리아 클라라(Maria Clara)의 눈은 어머니처럼 커다랗고, 속눈썹이 검고 길었다. … 그 어린 소녀의 머리카락은 금발에 가까웠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덕분에 얼굴 옆선이 우아했 다. 작고 매력적인 입술이 그녀의 어머니를 연상케 했다. 피부는 양파처럼 고왔고, 면화처럼 희었다.” 마리아 클라라는 19세기 필리핀 민족주의 소설가인 호세 리살(Jośe Rizal)의 대표작품인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의 등장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이 소설에서 클라라는 스페인 식민 통치기 필리핀의 부유한 지주인 카피탄 티아고(Capitan Tiago)의 외동딸로 등장합니다. 클라라의 아름다운 외모는 소설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강조되었고, 그녀의 성품 또한 매우 사랑스럽고 기품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리잘의 소설이 필리핀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소설로 부각되면서 소설 속 가상 인물이었던 마리아 클라라는 필리핀인들에게 “아름답고 우아한 필리핀 여성”의 전형으로 여겨졌습니다. 필리핀 여성들의 전통 의상으로 알려진 마리아 클라라 가운(Maria Clara Gown)도 리살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녀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메스티조 가운(Mestizo Gown)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스페인 식민지기에 유입된 스페인의 여성복과 필리핀의 전통적인 여성 복식인 바롯 사야(Barot Saya)를 결합해 만들어진 새로운 스타일의 복식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소설 속 마리아 클라라도 필리핀 메스티조였습니다. 필리핀 전통 여성 복식인 바롯 사야는 필리핀어로 블라우스를 뜻하는 바롯(Barot)과 스커트를 의미하는 사야(Saya)의 합성어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롯 사야는 상·하의가 한 세트로 이루어진 앙상블(Ensemble)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롯은 필리핀의 열대 기후를 고려하여 긴 소매를 가진 블라우스로 만들어졌으며, 사야는 발목 정도의 길이의 통 넓은 스커트로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상의인 바롯은 필리핀의 전통적인 직물공예방식을 이용하여 파인애플에서 채취한 섬유로 만들어져 통풍성을 더했습니다. 스커트인 사야는 길이와 색감에 따라 스타일이 매우 다양한데, 전통적으로 필리핀 여성들에게 흰색과 검정색 혹은 검정색과 빨강색의 조합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바롯과 사야에 두 가지 복식이 추가되어 총 4벌이 한 세트로 구성됩니다. 추가된 두 벌은 파누엘로(Panuelo)라고 부르는 스카프와 타피스(Tapis)라고 하는 오버스커트(Overskirt)로 구성됩니다. 먼저 파누엘로는 스페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반영하고 있고, 마리아 클라라 가운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연원이 되었습니다. 파누엘로는 넓고 뻣뻣한 재질의 블라우스로 제작되며, 스카프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바롯 위에 마치 망토를 걸치듯이 파누엘로를 착의하고, 가슴 앞에서 브로치로 양쪽 스카프의 끝단을 고정시킵니다. 파누엘로의 크기가 클수록 화려함은 배가 됩니다. 타피스는 사야 위에 앞치마처럼 착의하며, 치마의 이음새와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는 기능을 했습니다. 필리핀 여성 사이에 유행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의 영향력은 19세기 필리핀 화가들의 작품과 20세기에 촬영된 사진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필리핀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Fine Art Manila) 소장 라는 제목의 유화는 19세기 필리핀의 화가이자 혁명주의자였던 주안 노비치오 루나(Juan Novicio Luna)가 남긴 작품입니다. 회화 속 여성이 입고 있는 복식은 전형적인 마리아 클라라 가운입니다. 넓은 소매 덕분에 통이 넓어진 바롯은 마치 날개와 같이 보이고, 그 위로 망토처럼 착의한 파누엘로가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필리핀민속박물관(Philippines Folklife Museum)에 소장된 회화에서도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착의하고 있는 필리핀 중년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폭에 그려진 중년 여성의 복식은 마치 중세 유럽의 인물화에서 보이는 여성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특히 깔끔한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의 색상 대비, 묵주 목걸이는 가톨릭에 근거한 정숙한 여성상을 부각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본래 스페인 식민지 시기 동안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필리핀의 상류층 여성과 메스티조 여성들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착의하던 복식이었으나, 미국 식민지배기를 거치면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점차 필리피노 여성들의 전통적인 “패션(Fashion)”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필리핀 여성들이 공식적인 행사 혹은 웨딩드레스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착용한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미스 인터네셔널에 출전한 필리핀 대표가 전통 복식으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착의하고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마르코스(Marcos) 전 필리핀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 여사는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애용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이멜다 여사는 국가적 외교 행사시마다 여러 가지 스타일의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착의하고 등장했습니다. 그녀가 착의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최고급 실크와 파인애플 섬유를 결합한 맞춤 드레스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멜다의 영향력 덕분인지 오늘날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편의성을 갖춘 간편복으로도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국가적인 복식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스페인의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비롯되었으나, 이제는 명실상부 필리핀 여성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전통 의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는 호세 리살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존경과 함께, 소설 속 등장인물인 마리아 클라라에 대한 동경으로 만들어진 “전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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