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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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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1

[Column] 인도네시아 작가 에코 누그로호 Eko Nugroho, Unity in Hiding #1, Acrylic on Canvas, 200x200cm, 2018, Image Courtesy of Studio Eko Nugroho 글. 백아영 미술 칼럼니스트  전통과 현대를 오가는 에코 누그로호의 자유로운 감성을 만나보자.   에코 누그로호는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인도네시아의 전통 기법과 소재를 팝아트나 책, 만화, 애니메이션 등 타 매체와 접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자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렸다. 자신이 태어난 지역의 고유한 전통과 대중문화와 조화를 꾀하며 작품의 가능성을 확장한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염색 방법 중 하나인 바틱, 자수 같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기법을 활용해 과감한 컬러로 수놓은 작품들이 있으며, 신화와 우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그림자 인형극인 와양쿨릿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작품도 선보였다. 동시대의 이슈를 직시하며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 환경에 깊이 관여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199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는 사회뿐 아니라 예술계에서도 표현의 자유가 대두된 개혁의 시대였고, 에코 누그로호는 자유를 갈망하는 성향을 담은 스트리트 아트, 그래피티, 걸개그림, 벽화 등을 제작했다. 이후 조각, 애니메이션, 회화, 설치, 인형극 등 다양한 매체를 섭렵하며 영역을 넓혔으며, 인도네시아의 사회, 역사 등에 이르는 다양한 이슈를 위트 있는 시선으로 논의해 왔다. ‘2013 베니스 비엔날레’ 인도네시아관 작가로 국제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그는 같은 해 미국의 예술 전문 매체인 ‘아트+옥션’이 선정한 ‘50세 이하 유망 작가 50명’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 한 번 명성을 입증했다.  Eko Nugroho. Image Courtesy of Studio Eko Nugroho, Photo by Regina Sari De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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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2

봉사의 기쁨을 알리다 응웬 티 후에 2012년부터 대구북부소방대 무태지역대 여성의용소방대 대원으로 활동해온 응웬 티 후에   올해로 한국 생활 12년 차인 베트남에서 온 응웬 티 후에는 2012년부터 대구북부소방서 무태지역대 여성의용소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방 업무를 보조하고 우리 이웃들에게 베푸는 삶을 실천하는 응웬 티 후에와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12년 전 한국에 오시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베트남의 한 무역회사에서 통번역 일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지인으로부터 남편을 소개받았어요. 2년간의 연애 후 결혼을 하면서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2014년 6월 한국인으로 귀화해 ‘유민아’라는 한국 이름도 얻었고요. 지금은 자동차 부품 제조 회사에서 통번역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Q. 2012년부터 대구북부소방서 무태지역대에서 여성의용소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대원 활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2011년 무태동사무소에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무태지역대에서 여성의용소방대 대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베트남에 있을 때도 아기 돌보기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거든요. 한국에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좋은 기회가 온 거죠. Q. 무태지역대 여성의용소방대 대원이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크게 소방 보조 업무와 캠페인 활동으로 나뉘어요.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들에게 물이나 식사, 간식 등을 챙겨 줍니다. 잔불이 남아 있을 경우 함께 불을 정리하는 것도 저희의 몫이고요. 캠페인 활동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데요. 불조심 캠페인은 물론 여름에 폭염이 오면 물을 제공하고, 코로나19로 마스크 공장에 인원이 부족할 때는 직접 업무 지원을 나가기도 합니다. 또 대구엑스코(EXCO) 국제소방안전박람회가 열리면 베트남어 통역사로도 활동해요. Q.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고 계신데요. 직장에 다니면서 대원 활동을 병행하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오히려 제가 얻는 게 더 많아요. 대원 활동을 하며 좋은 한국인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덕분에 빨리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한국 문화를 가까이서 접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도 너무 재미있고요. 무엇보다 제가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베풀 수 있는 것 자체가 정말 기뻐요. 상대방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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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4

손끝으로 K-뷰티를 알리다 -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은진 이은진(좌측) 글로벌 커리어를 쌓고자 싱가포르로 향했던 이은진 씨는 올해로 15년 차 금융업계 직장인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입니다. 본업과 상관없이, 평소 꿈꾸던 메이크업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출산휴가가 주어진 때였습니다.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곧장 메이크업 아카데미에 등록한 은진 씨는 ‘Busy Korean momm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분주했지만, 그 시절이 어느 때보다 가슴 뛰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합니다. 2월 호에서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제2의 커리어로 싱가포르에서 K-뷰티를 알리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아세안문화원 독자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직장인이자 싱가포르에서 K-뷰티를 전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리고 카카오 브런치에 싱가포르 생활기를 쓰는 작가 이은진이라고 합니다. Q. 15년 전, 싱가포르로 이주하신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대학졸업을 앞둔 4학년 때, 한국무역협회와 산업자원부에서 주관하는 청년무역인력양성 사업에 뽑혀 6개월간 싱가포르에서 인턴생활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게 일하는 싱가포르에 큰 매력을 느꼈어요. 졸업 후에도 계속 싱가포르에 머물고 싶다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싱가포르에 위치한 글로벌 금융기업에 합격했고 이후로 쭉 아시아태평양 지역 법인영업을 담당하며 이곳에서 지내고 있어요. Q. 본업 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로도 활동하고 계시는데, 싱가포르에서 메이크업 아카데미를 수강하신 계기가 있으실까요? 원래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전부터 유튜브에서 메이크업 튜토리얼을 즐겨봤고 메이크업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대부분 평일 낮 수업이었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며 수업을 듣기란 불가능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수업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거든요. 그 점이 늘 아쉬웠는데, 때마침 출산휴가 기간과 아카데미 수업 개강 날짜가 맞물려 기회가 생겼고, 가족들도 응원해주어 용기를 냈습니다. 아카데미에 유축기를 들고 다닐 만큼 바쁘고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지만, 꼭 배우고 싶었던 전문 메이크업 기술을 익힐 수 있었기에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Q. 메이크업을 배우는 과정에서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메이크업을 한창 배우던 중, 때마침 팝업스토어에서 메이크업 시연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싱가포르의 유명 온라인 쇼핑몰과 한국화장품의 협업 이벤트였지요. 한국인으로서 우리나라 화장품을 외국에 홍보하는 동시에 K-뷰티 메이크업을 소개할 수 있어 보람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류열풍 덕분에 관심 있어 하시는 분이 많아 메이크업 시연 역시 좋은 호응을 얻었고요.    Q. 다문화, 다인종 국가 싱가포르의 메이크업 아카데미에는 그만큼 다양한 출신과 배경을 가진 수강생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동료들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같은 기수로 아카데미에 다녔던 이들 중 말레이시아 출신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싱가포르 국경 근처에 있는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에 살았어요. 메이크업 아티스트 자격증을 따기 위해 매번 국경을 넘는 셈이었죠. 그 친구는 자신처럼 조호르바루에 살면서 싱가포르로 출근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많아서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저는 배움을 향한 열정으로 매일 국경을 넘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재소자 출신 싱가포르 친구도 있었어요. 수감생활을 마친 후 새 출발을 위해 메이크업 아티스트에 도전하는 모습에서 새 삶을 위한 노력이 느껴져서 인상적이었어요.     함께 수업을 들은 모든 동료가 단순한 취미의 개념이 아니라 인생의 또 다른 도전, 혹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찾아온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저 역시 좋은 자극을 받고 더욱 진지한 마음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Q.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시지만 헤어 스타일링에도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어떻게 헤어 스타일링까지 배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헤어 스타일링 역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알아야 할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의 프리랜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메이크업뿐만 아니라 헤어도 동시에 하기 때문에 헤어 스타일링도 아카데미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헤어 스타일링은 메이크업이랑 또 다른 세계였는데, 손기술이 특히 중요해서 연습을 자주 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는 주로 학생들끼리 2인 1조로 조를 짜서 서로를 모델 삼거나 헤어모델을 구해서 연습합니다. 수업 시간 외에도 개인적으로 ‘dolly head’라고 불리는 헤어 스타일링 연습용 마네킹을 집에 설치해 연습하기도 했답니다.   Q. 싱가포르식 메이크업 외에 다른 나라의 메이크업도 배운 적 있으신가요? 싱가포르의 메이크업 아카데미 수강을 완료한 후 한국식 메이크업을 배웠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한국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배울 곳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한국 청담동에 위치한 메이크업 학원 원장님께 1대1 특강을 들었어요. 일종의 단기유학이라 생각하고 짧은 기간, 한국의 최신 메이크업 트렌드를 열심히 익혔어요. 이때 한국 여성에게 인기 있는 디자인 중, 아시아 여성으로 범위를 넓혀 적용 가능한 메이크업 트렌드에는 어떤 게 있을지 혼자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Q. 싱가포르식 메이크업과 한국식 메이크업을 모두 익힌 이유는 무엇인가요? 또, 새롭게 배우고 싶은 다른 나라의 메이크업 스타일도 있을까요? 한국식 메이크업이 싱가포르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을 때가 있고, 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이때 두 나라의 메이크업 스타일을 모두 알아두면 필요한 부분만 섞어 표현할 수 있어 유용합니다. 비단 한국과 싱가포르 스타일만이 아니라, 메이크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이 생겨나고 시즌별로 트렌드가 달라지기 때문에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매번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트렌드를 익히면서도 나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은 무엇인지 스스로 연구하는 자세도 필요하고요.     저는 요즘 인도계나 말레이계처럼 피부톤이 어두운 분을 위한 메이크업을 연구 중입니다. 익숙한 중국계 동양인 메이크업과는 피부표현 방식이 다르거든요. 또, 패션쇼에서 메이크업을 할 때는 백인이나 흑인 모델도 많기 때문에, 아시아뿐만 아니라 좀 더 글로벌한 무대에서 적용 가능한 메이크업을 앞으로도 꾸준히 배워나갈 예정입니다.  Q. 한국식 메이크업과 싱가포르식 메이크업이 많이 다른가요? 한국식 메이크업은 1밀리의 차이까지 섬세하게 다루고 꼼꼼한 베이스 메이크업으로 피부표현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반면, 다인종·다문화 국가인 싱가포르는 딱 떨어지는 하나의 공식만 선호하지는 않아요. 문화와 인종별로 잡아내야 할 포인트가 다르거든요. 예를 들어 중국계 모델에게는 부분 가닥 속눈썹을 붙여도 자연스럽지만 원래 속눈썹이 풍성한 인도계 모델에게는 따로 속눈썹을 붙이는 대신 컬링에 좀 더 신경 씁니다.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화장은 중국계 분들이 더 선호하고, 말레이계나 인도계 분들은 색상을 과감하게 활용하여 얼굴선을 입체감 있게 살리는 걸 선호하는 편입니다.   ‘2016 미스 싱가포르’ 본선에서 프리실라 마틴의 메이크업을 진행하는 모습 Q. 2016년 ‘미스 싱가포르 글로벌 뷰티퀸’으로 선정된 ‘프리실라 마틴’의 대회 당시 메이크업을 맡으셨었는데, 그때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당시에 미스 싱가포르 후보들은 수많은 메이크업 아티스트 사이에서 유일한 한국인인 저를 신기하게 여겼어요. 그들 중 프리실라가 가장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한국 드라마와 K- POP에 관심이 많은 적극적인 친구였는데, 한국인 아티스트가 표현하는 K-뷰티 스타일이 궁금했던지 저에게 메이크업을 부탁했죠. 본격적으로 메이크업을 시작했을 때에도 붙임성 좋은 프리실라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어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건강하게 태닝된 프리실라의 자연스러운 피부 표현에 중점을 두었는데, 다행히도 심사위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프리실라는 미스 싱가포르 글로벌 뷰티퀸으로 선정되었죠. 뿌듯하고 즐거웠던 작업 중 하나입니다. Q. 앞으로 참여하고 싶은, 혹은 직접 기획해보고 싶은 메이크업 관련 행사나 이벤트가 있을까요? 한번은 싱가포르의 대형 제과 프랜차이즈(Bread Talk)에서 주최하는 어머니날 기념 ‘메이크 오버 이벤트’에 아티스트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 메이크업을 할 기회가 없는 어머니들을 위한 이벤트였어요. 저도 아이를 둔 엄마인 데다 한국에 계신 친정엄마가 떠올라 굉장히 보람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특별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 혹은 소외계층을 위한 의미 있는 행사에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참여하고 싶어요. 그리고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에는 K-뷰티 쇼케이스나 팝업스토어에서 메이크업 시연을 함으로써 한국의 메이크업과 아름다움을 보다 많은 외국인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Q. 메이크업 아티스트 중에 롤모델이 있으신가요? 국내에서는 정샘물 원장님, 그리고 해외 아티스트로는 바비브라운입니다. Q. 자신만의 메이크업 철학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또, 자신의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고 싶으신가요? 이 세상에 못생긴 사람은 없어요.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개성과 장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부족한 부분을 억지로 가리거나 다른 누군가를 따라 하는 메이크업보다는, 개인이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에 집중해요.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을 통해 모두가 ‘나다운 아름다움’을 찾도록 돕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앞으로 제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불릴 때는, ‘동남아 시장에서 활약하는 K-뷰티 전문가’이자, ‘아름다운 자신감을 선물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싱가포르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습니다. 끝으로 이분들께 격려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싱가포르에 살면서 한국인에 대해 근면 성실하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싱가포르에서 묵묵히 제 몫을 해낸 수많은 한국분들이 계신 덕분이겠지요. 타지 생활이 만만치 않음에도 본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는 모든 교민분들을 응원합니다. 저 역시 싱가포르에서 K-뷰티를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되는 한국인 아티스트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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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 커피마스터의 향긋한 이야기 - 이진호​ 이진호(왼쪽에서 세 번째), 밴드 ‘노브레인’ 이성우와 함께 “당장은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제가 기대했던 결과가 안정적으로 이어지면, 그때는 다시 커피와 함께하고 싶어요.” 한국인 커피마스터 이진호 씨는 요즘 인도네시아의 봉제 회사에서 생산관리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치커피 붐이 일었던 2011년, 한국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그는 아시아의 최대 커피 생산국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주해 또 다른 커피 전문점을 열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커피와 사람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각별합니다. 언젠가 인도네시아의 향긋한 커피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진호 씨를 소개합니다. Q. 아세안문화원 독자분들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이진호라고 합니다. 2011년 9월 아내, 딸과 함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주했어요. 처음에는 북부 자카르타에서 더치커피와 초콜릿 전문점을 운영하였고, 현재는 인도네시아 중부 자와에 있는 봉제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Q.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생두 수출입과 커피전문점 사업을 위해 장기 출장 개념으로 자카르타에 왔어요. 그 후 외국인 허가법인 설립을 계획하고 인도네시아 지방 곳곳에 있는 여러 커피 농장을 왕래하면서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어요. 더치커피가 처음 시작된 자카르타의 옛 이름, ‘바타비아’에서 제가 가진 커피 기술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인도네시아에는 커피 사업 전 의류 벤더회사를 다닐 때 출장을 다녀온 경험이 있기도 했고, 학교선배가 살고 있기도 해서 다른 나라에 비해 낯설지 않았어요. Q. 2000년대 후반, 홍대에서 ‘미즈모렌’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한국에 더치커피 붐을 처음 일으킨 장본인이세요. 많은 산업 중 ‘커피’ 산업에 종사하셨던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우연히 마셨던 더치커피에 완전히 매료되었거든요. 오래전 의류 벤더회사를 다니던 중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에 머문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셰프로 일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요리를 배우고, 외식업 운영방법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여러 프랜차이즈 매장을 방문하던 중이었어요. 우연히 들른 오사카의 한 커피 전문점에서 더치커피를 마셨는데 기막히게 맛있는 거예요. 몇 잔을 연달아 내리 마신 탓에 그날 밤 잠을 못 이뤘지만, 커피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고 ‘이거다!’ 싶었죠. 그때부터 식당에서 카페로 업종을 바꾸고 일본 나고야에서 커피 로스팅부터 추출까지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홍대에서 8대의 콜드브루 커피 기구로 하루 30,000cc 정도 생산 가능한 더치커피 전문점을 오픈하게 되었죠. 카페 ‘미즈모렌’을 운영하던 시절 Q. 인도네시아에서는 루왁커피가 워낙 유명하잖아요. 루왁커피 외에도 다양한 커피가 있을 것 같은데, 인도네시아 커피만의 매력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사향고양이가 커피체리를 먹고 배설한 씨앗을 말려 만드는 루왁커피는 소량만 생산되고 볶은 후에는 잔향이 오래 지속되어 인도네시아에서 유명한 커피 중 하나이긴 합니다. 하지만 커피 농장에 방문했다가 케이지 안에 한 마리씩 갇혀 익지도 않은 커피체리를 먹고 있는 사향고양이를 보게 된 후로는 커피 평가를 해야 하는 특별한 일 외에는 마시지 않게 되었어요. 루왁커피가 아니어도 인도네시아에는 재배되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 환경에 따라 다른 매력을 가진 커피들이 많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수마트라섬의 만델링과 아체, 린통과 플로레스, 토라자, 파푸아 커피가 있겠네요. 특히, ‘반둥’이라는 도시에는 인도네시아아에서 재배되는 대부분의 생두를 구매하여 원두만을 따로 판매하는 숍도 있답니다. 연중 선선한 반둥의 날씨를 활용하여 창고에서 생두를 3~5년간 숙성하고, 100년 된 독일제 장작 로스팅 기계로 볶아내죠. 덕분에 지역별 특성을 품은 원두들에 더욱 깊은 풍미가 생겨납니다.    Q. 인도네시아와 한국, 양국의 커피문화에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한국은 경제가 발전하고 여가생활과 디저트 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과정에서 드립 커피와 에스프레소 커피 전문점이 대중화되었지만, 인도네시아는 아직까지 인스턴트커피가 더 인기 있습니다. 물론 원두커피를 마시기도 하지만 원두커피 본연의 맛보다는 설탕이나 향이 가미된 시럽을 넣어 마시는 걸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또, 차와 담배 경작지가 많아 커피와 차, 담배를 함께 즐기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인도네시아 커피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Q. 현재는 봉제 회사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커피에서 봉제 쪽으로 산업을 변경하신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가 가진 자본으로 커피 사업을 시작했지만, 로케이션 문제로 자카르타 북부지방에 오픈한 가게를 3년 만에 접게 되었습니다. 이후 현지인, 한국인과 동업하여 진행한 사업도 수익이 나지 않았고, 그때부터는 저만 보고 먼 곳까지 이주한 가족들을 위해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인도네시아에서 알고 지낸 교민분들의 도움으로 봉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며 몸을 움직이고, 교류하고, 새롭게 무언갈 배운 덕분에 살아가는 원동력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Q. 현재는 커피 산업에 종사하진 않지만, 여전히 ‘커피마스터’로 불리는 커피 전문가세요. 요즘도 종종 가족들이나 동료들에게 직접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시곤 하나요? 네, 물론입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양국에서 동종업계분들이 인도네시아 커피에 관해 물어오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질문에 답변도 하고 커피도 함께 시음합니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직장동료에게 직접 내린 커피를 대접하거나 집에서 볶은 신선한 커피로 만든 드립백을 선물하곤 합니다. 커피 관련업에 종사하는 지인분들과는 커피를 마시며 생산지별 맛과 향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기도 합니다.  Q. 어떤 방식으로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지인이 전해준 책과 어학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인니어 MP3 파일로 매일 공부했고, 현지인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책으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현지인과 함께 웃고 떠들며 대화하고 공감하는 것이 언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Q. 올해로 9년째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셨어요.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느낀 인도네시아의 좋은 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국의 장점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조급증을 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간혹 다혈질적인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자원과 먹을 것이 풍부한 나라여서 그런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국의 좋은 모습으로는 ‘하면 된다’ 정신이 떠오르네요. 한국 사람들의 끈기와 정신력은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해요. Q.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사귄 인도네시아 친구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카페를 오픈하고 며칠 안 되었을 때, 근처 다른 가게에서 일하는 점주 ‘아리수노(Aurisuno)’가 찾아왔어요. 그 친구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백반 정식인 ‘빠당(Padang)’을 팔고 있었는데, 저희 가게 커피에 관심이 많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졌습니다. 아리수노가 저에게 인도네시아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 알려주면, 저는 커피와 한국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인도네시아 NET TV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게 된 일이 있었는데, 아리수노가 저와 PD분 사이에서 통역을 도와주기도 했지요. 연말이면 항상 가족과 함께 먹으라며 케이크를 가져다주는 마음씨 좋은 친구입니다. Q.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며 겪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처음 자카르타 북부에 카페를 오픈할 때부터 지금껏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는 이성우 씨와의 에피소드가 여럿 기억납니다. 인기밴드 ‘노브레인’의 보컬인 이성우 씨는 많은 교민들을 초청해 카페 오픈 기념 미니 콘서트를 열어주었으며, 자카르타 축구경기장에서 열린 초대형 SM 콘서트에 초대해주어 함께 일하는 현지 직원들과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교장 선생님과 교직원분들, 그리고 한-인도네시아 문화원생을 대상으로 커피, 와인 교육을 했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쇼콜라티에인 와이프의 도움으로 초콜릿 교육도 함께 진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Q.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당장은 지금 하고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2천 명 이상의 직원이 있는 봉제공장에서 생산관리직을 맡았는데, 직원들에게 효율적인 작업방법을 알려주고 좀 더 체계적인 공정으로 관리하여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제가 기대했던 결과가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한다면, 그때는 다시 커피와 함께하고 싶어요. 장기적으로는 인도네시아 여러 섬의 커피 농장에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커피·카카오 농장투어와 카페운영 사업도 계획 중입니다. 인도네시아 대자연에서 느낀 편안함과 커피, 그리고 초콜릿이 직접 만들어지는 과정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답니다. Q. 인도네시아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습니다. 끝으로 이분들에게 격려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 한 기사가 마음을 울렸습니다. 50년 전, 한국에서 평화봉사단 활동을 했던 미국인 ‘산드라 네이슨’ 씨가 한국의 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코로나19 생존키트와 비단부채 등이 담긴 선물상자를 소포로 받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과거 어려운 시기 한국을 찾아 도움을 주었던 이에게 한국이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한 것이죠. 저도 지금 함께 일하는 인도네시아 동료분들이 먼 훗날 한국과 저를 좋은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도록 더욱 진심을 담아 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고, 2주 자가격리 기간 때문에 휴가를 받아도 한국에 가지 못하는 요즘 같은 시기는 모두 처음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줄 수 있는 나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자긍심으로, 우리 함께 힘들고 어려운 해외생활을 잘 이겨냅시다. 우리를 관통해 지나가는 모든 시간은 훗날 돌이켜보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거름일 테니, 지금 머물고 계신 그곳에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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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2

‘전에도 여기서 머리 했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행복해요 - 베트남에서 온 미용사 김재희​ 김재희 한국에 사는 베트남 출신 김재희 씨는 13년 차 미용사입니다. 실력 좋고 성실한 재희 씨의 미용실에는 단골손님이 아주 많습니다. 낯선 땅에서 미용사가 되는 길이 처음부터 쉽고 즐겁기만 했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천직이라 말할 정도로 딱 맞는 직업이 되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미용실을 찾은 손님이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갈 때 가장 행복하다는 재희 씨를 만나보았습니다. Q. 미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전부터 미용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도전해 볼 용기가 없었어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잠깐 한 것 외에는 살림하느라 일을 배운 경험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한국어도 잘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미용기술을 배우겠나 싶었지요. 그런데 남편이 한번 해보라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용기를 줬어요. 결정적으로, 처음부터 미용 기술을 익히기는 어렵겠지만 일단 미용실에 가면 작은 일부터 배울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그렇게 2008년부터 미용실에 출근하게 되었고, 물품 정리와 청소 등 작은 일부터 배우며 미용 인생을 시작했어요.   Q. 재희 씨께 머리 손질을 받은 첫 손님이 누구였는지 기억하시나요? 잘 기억나죠.(웃음) 미용실에 자주 오는 여자분이셨어요. 이전까지 저는 청소를 하거나 원장님이 커트하시는 걸 옆에서 보기만 했는데, 그 손님께서 제게 머리 손질을 받아보고 싶다고 하신 거예요. “무엇이든 직접 경험을 해야지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면 배울 수가 없어요”라며 기회를 주셨어요. 정말 엄청 떨렸어요. 잘하고 있는 건지, 이게 맞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든 실수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커트와 샴푸를 해드렸어요. 미용을 마친 후 손님께서 “마음에 쏙 들어요. 고맙습니다”라고 칭찬해주셔서 뛸 듯이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Q. 한 인터뷰에서 ‘한국에 계신 친정엄마’를 언급하셨는데, 실례되지 않는다면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주여성과 한국 여성이 딸과 친정어머니로 결연을 맺을 수 있도록 시에서 주관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국 친정엄마(이하 ‘엄마’)’를 처음 만났습니다. 엄마는 처음 만난 그 날 이후부터 언제나 저를 친가족처럼 따뜻하게 돌봐주세요. 미용을 처음 시작한 무렵에는 엄마에게 전화해서 “엄마, 나 너무 힘들어. 미용 그만둘래.” 하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떤 일을 해도 익숙해지기까지는 힘이 들어. 일단 한번 참고 해봐. 넌 솜씨가 좋으니까 금방 잘하게 될 거야!” 하고 격려해 주시곤 했죠. 사실 처음 미용 공부를 시작하려고 할 때, 미용실을 소개해주신 분도 엄마였어요. 제가 처음 다닌 미용실 원장님과 엄마가 친구 사이셨거든요. Q. 커트, 파마, 염색, 매직 등 다양한 미용기술 중 재희 씨가 가장 자신 있는 기술은 무엇인가요? 다른 건 몰라도 염색에는 정말 자신 있어요.(웃음) 멋 내기 염색, 뿌리 염색, 흰머리 염색··· 다 완벽히 해요.    Q. 한국과 다른 베트남만의 특별한 미용 문화가 있나요? 양국이 거의 비슷한데 결정적 차이가 하나 있어요. 한국은 미용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데, 베트남에서는 자격증이 없어도 실력만 있으면 미용실을 차릴 수 있어요. 아! 그리고 한국에서는 보통 ‘미용’이라고 하면 각 분야로 영역을 나눠요. 헤어숍이면 머리 손질만 하고, 네일숍이면 네일만 하는 곳이 많은데, 베트남에서는 하나의 숍에서 ‘미용’이라고 불릴만한 모든 걸 다 할 수 있답니다. 하나의 공간에서 머리도 다듬고 네일도 하고 마사지도 운영하는 미용 멀티숍인 셈이죠. Q. 베테랑 미용사인 재희 씨가 생각하기에, 좋은 미용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일단 끈기가 있어야 해요. 어려운 기술을 익혀야 하고,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 쉬운 직업이거든요. 누구나 초보 시절에는 기대한 만큼 손이 안 따라줘요. 저도 미용기술을 처음 배울 때는 하루에 한 번씩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머릿속으로는 이미 멋진 미용사인데 막상 가위를 들면 생각처럼 안 되니까 스트레스가 엄청났죠.(웃음) 그런 배움의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쓴소리를 들어야 하고 자신에게 실망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꺾이지 않고 버티면 다음 단계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엔 좋은 미용사가 되려면 끈기와 참을성부터 길러야 할 것 같아요.  미용실에서 일하는 모습 Q. 재희 씨의 미용실에는 오랜 단골손님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이 있을까요? 저는 정해진 운영시간을 지킵니다. 운영시간은 손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쉬고 싶은 날 쉬고, 일찍 들어가고 싶다고 미용실 문을 일찍 닫지 않아요. 그리고 미용할 때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요. 빨리빨리 끝내고 손님을 더 받으면 당장 매출은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 손님도 저도 만족할 수 없거든요. 욕심을 비우고 지금 제게 서비스를 맡긴 손님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아요. 어떤 장소에서 좋은 경험을 하면, 언젠간 그곳을 다시 찾게 되잖아요? 제 미용실에서 좋은 기억을 안고 돌아가셨던 손님들이 “전에도 여기서 머리 했어요. 이번에도 예쁘게 해주세요” 하고 다시 찾아오실 때면 뿌듯해진답니다.  Q. 미용사로 일하며 경험한 잊지 못할 추억이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에피소드보다는, 사람이 기억납니다. 매번 찾아와서 좋은 말을 해주던 이모가 계셨어요. (아! 친한 분이라 이모라고 불렀어요.) 다른 곳에서 일하는 분이셨는데, 매번 미용실에 오셔서 일을 도와주시고 “재희 너는 이모가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씀하셨죠. 한국 생활에 관해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시기도 했고, 제가 새 미용실을 인수해서 직접 운영을 시작했을 때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응원하러 오셨어요. 저는 한국에 와서 좋은 사람들만 만난 것 같아요. 한국말로 ‘인복이 좋다’고 할까요? Q. 만약 한국에서 미용사가 되지 않았다면 도전하고 싶었던 다른 직업이 있나요? 아가씨였을 때는 회사원으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제가 원래 낯가림이 심해서 처음 보는 사람을 상대하고 대화하는 걸 힘들어했거든요.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 되면 늘 보던 사람만 보고, 본인 일만 잘하면 된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오히려 성격이 좀 바뀌었어요. 미용사가 되어서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자연스레 배웠나 봐요. 지금은 미용사가 천직이 됐죠.(웃음)  Q. 머리 손질을 스스로 하시나요? 아니면 재희 씨도 본인 머리를 손질할 땐 다른 미용실을 이용하나요? 드라이 정도는 스스로 하지만 커트랑 염색은 혼자 하기 힘들어서 친한 언니를 부릅니다. 전에 미용실에서 같이 일한 언니인데 지금은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어요. “언니, 저 머리 좀 해주세요.” 하면 금방 오셔서 손질해주십니다. Q. 가족들도 재희 씨 미용실에 자주 방문하나요?  물론이죠. 가족들 머리 손질이 제 담당이거든요. 남편과 아들들도 자주 오는 편이고 시어머니께서도 종종 들르세요. 제가 처음 미용사 자격증을 땄을 때 제일 기뻐하신 분이 우리 시어머니세요. 자격증을 딴 날, 온 가족을 다 불러서 저녁을 사주시기도 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작은아들이 어렸을 때 “엄마가 미용실 차리면 나는 청소하고, 형아는 엄마 머리 하는 거 도와주고, 아빠는 카운터 일 하면 되겠다”고 말할 정도로 여기 오는 걸 좋아했어요. 온 가족이 다 같이 미용실에서 일하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요. 그런데 막상 미용실을 차리니까 청소를 도와주러 오지는 않더라고요.(웃음) 이제는 본인도 컸다고 이것저것 할 게 많다는 거겠죠.  Q.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베트남과 한국은 2시간 정도 시차가 나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베트남에서는 아침에 시장에 가서 간단히 한 끼 먹은 후 점심 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한국 사람들은 대개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 아침 7시면 베트남에서는 5시인 셈이니까 처음에는 시차에 적응하느라 애썼죠.  Q. 재희 씨 외에도 한국이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베트남 사람들, 또 아세안인들이 많습니다. 끝으로 이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의 음식, 날씨, 언어, 생활은 전부 여러분의 모국과 다르고, 그래서 문화도 달라요. 여기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한국에 오셨다면 한국 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여야 해요. ‘우리는 안 그러는데 여기는 왜 이러지?’ 하면서 투덜거리기보다, 차이를 인정하고 천천히 알아가야 합니다. 다른 문화를 배우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재미있기도 하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배움이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을 위한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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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6

꿈을 심는 한국 속 태국농장 – 베테랑 농부, 안유정​​​ 아들과 함께 한국에 사는 태국 출신 안유정 씨는 요즘 베테랑 농부로 불립니다. 20년 전, 한국에 처음 발 디딘 그녀는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한국 속 태국농장’이라는 새로운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옛말처럼,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가꿔온 유정 씨의 농장에는 어느덧 정성을 먹고 자란 채소가 가득합니다. 11월호에서는 꿈을 심는 농부 유정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태국과 토양도 날씨도 다른 한국에서 태국 채소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처음 태국 채소 모종을 들여와 농사를 해보겠다고 생각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엔 제가 먹으려고 재배를 시작했어요. 한국 마트에는 동남아시아산 채소가 거의 없었거든요. 마침 씨앗을 구할 기회가 있어서 직접 재배를 시도했는데 처음부터 잘된 건 아니었어요. 싹도 안 트고 시들고··· 여러 번 실패했지만 계속 심었어요.(웃음) 태국 날씨가 한국의 여름 날씨와 비슷하니까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는데, 정말로 어느 순간부터는 채소들이 잘 무르익기 시작했어요. 신이 나서 더 많이 재배하다 보니 잉여채소들이 생겼고 그때부터 ‘한국 속 태국농장’을 가꿔보자 결심했습니다.  Q. 그때 가장 먼저 응원해준, 혹은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구였나요? 아버지, 아! 저희 시아버님이요. 제가 시아버님을 아버지라 부르거든요. 아버님은 젊을 때부터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기술이 남다르세요. 저는 태국에서도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초짜였는데 아버님께서 저를 믿고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꼼꼼히 배울 수 있었고, 베테랑 농부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Q. 요즘은 어떤 채소들을 재배하시나요? 가장 많이 재배하는 건 태국 고추인데 한국 고추에 비해서 작고 얇고 맵습니다. 태국 가지를 두 번째로 많이 재배하고 레몬그라스, 공심채, 카이란(kailaan)도 조금씩 기르고 있습니다. 저 혼자 하는 농사이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고 가능한 만큼만 재배하려고 해요. 채소는 수확 시기 내에 다 수확하지 못하면 꽃이 피어버리니까 욕심내서 한꺼번에 많이 심으면 안 되거든요. Q. 한국에서 태국 채소를 기르다 보면 서로 닮은 한국과 태국의 채소를 발견하실 때가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비슷한 채소가 꽤 있어요. 대부분 맛은 비슷한데 모양이 약간 달라요. 대표적으로 태국 고추는 한국 고추보다 얇고 자랄 때 위로 솟아올라요. 태국 고추가 좀 더 매운 걸 제외하면 맛은 비슷하고요. 된장찌개에 얇게 썰어 넣으면 더 개운하게 드실 수 있답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많이 재배하는 초이삼이 한국에도 있어요. 모양은 좀 다른데 맛은 한국의 ‘청경채’랑 같습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태국 고추 Q. 농사를 지으며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몇 년 전 친정엄마가 한국에 방문하셨는데, 농장을 보신 후 첫마디가 ‘네가 한 거라고? 어떻게 네가 이런 걸 만들어냈니?’ 였어요. 태국에서는 농사를 지어본 적 없었거든요. 고구마를 사먹으면서도 고구마가 어디에서 자라는지, 씨앗은 어떻게 싹트는지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한국에서는 베테랑 농부가 되어있으니 놀라신 거죠. 더 보람있는 건 어머니가 한국에 계시는 동안 제 농장에서 태국 가지를 재배하는 방법을 배우시고는 요즘 태국에서 직접 가지를 재배하신다는 거예요.(웃음) 너무 재밌죠? Q. 12년 차 베테랑 농부로서 꼭 지키고 있는 ‘농사 철칙’이 있나요? ‘농약을 치지 않는 것’입니다. 농약은 눈에는 안 보이지만 몸에 큰 해를 끼칩니다. 사실 올해는 폭우 때문에 비닐하우스 안에 물이 차면서 벌레가 함께 들어와 잎새를 파먹었는데, 이 철칙을 지키느라 농약을 뿌리지 않고 세 번이나 돌려보내줬어요. 처음 발견했을 때 ‘약 안 뿌릴 거니까 먹고 싶으면 네 맘대로 먹어라’하고 용서해줬더니 잎새 먹고 자란 벌레가 새로 자란 잎새를 또 먹더라고요. 그때도 상품가치가 떨어진 채소를 걷어내기만 하고 약을 뿌리지 않았더니 최근에는 몸이 더 커진 벌레가 이쪽 먹고 저쪽 먹고, 또 그 옆쪽도 먹어버리더라고요. 얘들 너무 한 거 아닌가요?(웃음) ‘너희 또 오면 다음번엔 진짜 혼쭐난다!’ 하고 소리쳤는데 벌레들이 제 경고를 들었는지 모르겠네요.(웃음)    남편과 함께 Q. 결혼하시기 전 남편분과 처음 태국에 왔을 때, 남편분께서 태국 고추를 아무 가공 없이 드셨다가 아주 매워하셨다고요. 그날의 에피소드를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그날 정말 깜짝 놀랐어요. 남편이 태국 고추를 손으로 딱 잡더니 그대로 먹어버린 거예요. 한국에서는 생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거나 그냥 먹기도 하지만 사실 태국에서는 생으로 잘 안 먹거든요. 너무 매우니까 얇게 썰거나 빻아서 양념을 하거나, 어떻게든 조리를 해 먹지 그냥은 안 먹어요. 한국식 표현으로, 남편은 입에서 불을 뿜었죠.(웃음) 눈물을 흘리고 땀도 뻘뻘 나서 괴로워했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그랬던 남편이 지금은 저보다 더 태국 고추를 잘 먹게 되었답니다. Q. 태국 고추를 한국에 널리 알리고 외국으로 수출하는 것과, 아이들과 함께하는 ‘농장체험’을 운영하시는 게 꿈이시라고요. 좀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아도 꾸준히 염원하고 있는 꿈이에요. 유기농인증을 받는 것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시간이 제법 걸릴 거에요. 친환경인정기관에서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게 정말인지 여러 번 땅을 파 검사를 진행하는데, 검사를 마친 후에는 개인 교육을 받고 시험도 통과해야 해요. 저는 한국말이 아직 서툴러서 이 시험에서 계속 떨어져요.(웃음) 언젠가 유기농인증을 받으면 태국 고추를 한국에 널리 알리고 나중에는 가까운 외국에도 수출하고 싶습니다.     ‘농장체험’은 올해 충청남도 교육청에서 인증을 받고 모든 준비를 마쳤었어요. 봄에 고추 모종을 준비하고 체험활동을 진행할 수 있는 농장을 마련해뒀는데 안타깝게도 코로나19가 발생하는 바람에 개장을 못 했습니다. 나중에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농장체험장을 열어서 아이들에게 태국 고추를 재배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우리 농장에서 채소를 길러보도록 할 거예요. 심었던 씨앗이 열매가 되면 함께 먹어보고 맛은 어떤지, 모양은 어떤지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네요. 올해는 아쉽게도 문을 열수 없겠지만 내년에는 꼭 개장할 수 있길 소망해봅니다. Q. 아드님이 진로를 태국어 학과 쪽으로 정했다고요. 그렇게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지요? ‘유정 씨의 한국어 실력’과, ‘아드님의 태국어 실력’을 비교하자면 승자가 누굴지도 궁금합니다. 천상이(아들)의 목표는 태국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 트랙에 진학하는 거예요. 부산외국어대학교는 매년 태국에 있는 대학교랑 연계수업을 진행하는데, 알고 보니 제가 졸업했던 태국의 시나카린위롯 대학교(Srinakharinwirot University)와 연계수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한국 대학생은 태국에, 태국 대학생은 한국에 오가며 양국이 활발히 교류하는 연계수업이 있는데, 아마 그 수업을 보고 부산외국어대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아들의 태국어 실력이 제 한국어 실력보다 좋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20년이나 살았지만 아직도 한국어가 서툴러요. 오히려 이제 막 한국에 온 태국 사람들이 다문화센터를 통해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저보다 더 잘하죠. 훨씬 먼저 온 선배인데 후배보다 한국말을 못해서 요즘 다문화센터에 자주 못 갑니다.(웃음) ‘언니, 한국에서 몇년 지냈어?’ 물을 때 20년 동안 살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더라고요. 그만큼 요즘 한국의 다문화센터나 이주여성을 위한 기관들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시아버지와 함께 농사일하는 모습 Q. 시아버님께서 유정 씨의 성실함을 눈여겨보시고 한평생 익힌 농사기술을 모두 가르쳐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유정 씨의 농기계를 직접 갈아주신다고요. 시아버님과 둘도 없는 사이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먼 타국에서 온 저를 아버님께서 많이 돌봐주셨어요. 특히 아버님이 제게 가르쳐주신 농사는 이제 제 인생이 되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한 저만의 생계수단이자 꿈입니다. 아버님은 제가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는 눈감고 못 본척해주시고, 제가 조금이라도 잘하는 일은 크게 칭찬해주셨어요. 전 많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아버님은 그런 제게서 좋은 부분만 보려고 노력해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아버님께 지금까지 제게 해주신 모든 것에 다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아버님이 안 계셨다면 한국에서 적응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아버님 덕분에 지금껏 한국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Q. ‘시부모님을 잘 만난 것도 큰 복이었다’라고 말씀하신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생전 시어머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님은 정말 착한 분이셨어요. 아버님을 좋아하고 잘 따르셨고요. 아버님이 왼쪽으로 가라 하면 왼쪽으로 가시는 분이었어요. 남편이 왼쪽으로 가라 하면 청개구리처럼 오른쪽으로 가는 저와는 다른 스타일이셨죠.(웃음) 아버님께서 저를 다정히 대해주시니 어머님도 아버님처럼 저를 잘 돌봐주셨어요. 드라마 속 한국 시어머니들은 되게 무서운데, 우리 어머님은 제게 잔소리 한 번 없으셨어요. 둘도 없을 좋은 분이셨습니다.  Q. 한국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태국의 좋은 문화가 있나요? “Thailand is the land of smile.” 태국은 미소의 나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웃고 농담을 건네요. 손이 일할 때 입도 같이 일하면 너무 힘들지만, 손은 일하더라도 입은 웃고 있으면 즐겁잖아요. 한국분들께는 우리가 느려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은 일을 즐기진 않지만 신속하게 끝내고, 태국 사람들은 좀 느리지만 즐겁게 일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두 나라의 문화가 적절히 섞이면 딱 좋겠죠? Q. 유정 씨 외에도 한국이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태국 사람들, 또 아세안인들이 많습니다. 끝으로 이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파이팅 하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파이팅 하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타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처음부터 편할 수는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내하고 도전하면서 살아가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언젠가 반드시 행복한 날이 찾아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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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8

싱가포르의 맛을 한국에 선물합니다 - 응켕렝 셰프 ‘2017 아세안 음식 축제’에 싱가포르 대표로 참석한 응켕렝 셰프(중앙)   예로부터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주변에 음식을 대접해왔습니다. 때로는 축하하는 마음을, 때로는 위로의 마음을 담은 음식을 상대와 나누는 것입니다. 지난 2014년부터 한국에서 싱가포르 디저트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싱가포르 출신 셰프 응켕렝 씨도 그런 마음을 한국 사람들과 나눕니다. 10월호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나라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음식을 만들 수 있어 기쁘다는 응켕렝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아세안문화원 독자분들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싱가포르에서 온 응켕렝(NG KENG LENG)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외국인 법인을 설립하여 싱가포르 전통 디저트와 음료를 만들고 있습니다.    Q. 2014년부터 싱가포르 디저트 카페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싱가포르 디저트 카페를 시작하게 된 계기나 이유가 있을까요? 한국에서 창업하기 훨씬 전부터 한국을 좋아했고, 여러 번 여행도 왔었습니다. 이후에 한류에 심취해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1년간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언어교육원에 다니던 시절의 한국 생활은 너무나 즐거웠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싱가포르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디저트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었습니다. 싱가포르식 음료와 디저트를 그리워하다가 문득, ‘내가 한국에서 직접 싱가포르의 디저트와 커피를 만들어 소개하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좋아하는 나라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면 즐겁겠다는 마음이었지요.  Q. 셰프님이 생각하는 싱가포르 디저트만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한국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싱가포르만의 맛이 있을까요? 싱가포르에서는 오래전부터 싱가포르만의 독특한 음료·디저트 문화가 형성되어 왔습니다. 동서양의 맛이 잘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싱가포르인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었죠. 싱가포르에는 외국에서 입점한 카페 외에 지역민들이 가는 전통카페가 따로 있는데, 전통카페의 커피는 아주 진하면서도 고소한 향이 나는 게 특징입니다. 보통 싱가포르 사람들은 전통카페의 커피를 마실 때 달걀 반숙에 카야토스트를 찍어 먹거나, 꽃향기가 물씬 나는 판단 케이크(한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싱가포르의 ‘국민 케이크’)를 함께 즐깁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연유를 사용한 싱가포르식 카페 라테 ‘코피-C(Kopi-C)’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는 서양식 커피전문점은 흔히 찾을 수 있지만, 동남아시아 쪽 커피와 디저트류를 파는 가게는 여전히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커피를 즐기는 한국 사람들에게 고소한 향이 매력적인 ‘코피-C’를 대접하고 싶네요. Q. 한국의 전통 디저트에 대한 셰프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한국의 떡, 식혜, 빙수를 맛보았습니다. 동남아시아인들에겐 찹쌀의 끈적거리고 차진 식감이 인기가 없는 편이지만, 한국의 떡은 특별하고 맛있었습니다. 떡과 함께 맛본 식혜는 ‘쌀이 들어간 달콤하고 낯선 음료’처럼 느껴졌어요. 제 입맛에 가장 맞았던 건 한국식 빙수였습니다. 한국 디저트 가게의 빙수들은 모양도 화려하고 맛있어서 고향 친구들이 한국에 오면 가끔 데려가곤 합니다. 참! 한국 사람들은 싱가포르로 여행을 가면 대패로 간 것처럼 부드러운 싱가포르식 빙수가 맛있다고 하더군요. 반대로 싱가포르 사람들은 한국식 빙수가 새롭고 맛있다고 하고요.(웃음)  리셴룽 총리 부부와 함께, 응켕렝 셰프(좌측 아래) Q.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 부부가 카페에 방문한 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오신다는 말 없이 깜짝 방문하신 건가요? 훨씬 전부터 주한싱가포르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총리 부부께서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를 위해 한국에 오실 때 대사님이 직접 두 분을 모시고 저희 가게에 방문하실 예정이라고요. 그리고 방문 일주일 전부터 지속적으로 한국 경찰관들과 싱가포르 경호원들이 가게 내부의 보안을 확인했으니 깜짝 방문은 확실히 아니지요.(웃음)     총리 부부와 대사님께서는 아보카도 음료와 경단, 그리고 판단 케이크를 드셨습니다. 다들 한국에서 싱가포르 전통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것에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모든 메뉴를 수제로 만들어 싱가포르의 맛을 한국 사람들과 나누고 있는 점을 특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날 저희는 가게를 운영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또 한국의 좋은 문화 등에 관해 오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Q. 긴 시간 동안 한국에서 카페를 운영하시며 겪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한국의 기업으로부터 많은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모두 내로라하는 기업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제안을 수락하지 못했습니다. 백화점에 점포 하나를 내기 위해서는 식품제조허가를 받아야 하고 공장부터 물류와 매장을 담당할 직원들이 추가로 필요한 등, 매장 하나를 더 짓기 위해 따라오는 일들이 아주 많았거든요. 외국인인 제가 이 모든 것을 해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사업가가 되느냐, 지역 맛집의 셰프로 남느냐의 기로에 선거지요. 우선은 후자를 선택해 모든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저희 가게를 좋게 봐주셨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제안을 수락하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Q. 2017년 강남 코엑스에서 개최된 아세안 창립 50주년 기념 ‘아세안 음식 축제’에 싱가포르 대표 요리사로 참석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기념행사는 코엑스에서 4일간 열렸습니다. 아세안 각 나라의 정부가 인지도 있는 유명 셰프들을 한국으로 초대하여, 각국에서 모인 수많은 참가자분들께 음식과 디저트를 대접하는 축제였습니다. 싱가포르관광청에서 저희 가게를 강력하게 추천하여 참가하게 되었는데, 싱가포르를 대표해서 이런 큰 행사에 참가하게 된 것이 너무 놀랍고 기뻤답니다. 밀크티와 카야토스트 등 싱가포르의 디저트와 음료를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손님들에게 대접하고 소개할 수 있었던, 아주 소중하고 보람찬 경험이었습니다. Q. 셰프님께서 느끼시기에 싱가포르와 한국이 문화적으로 서로 다르거나, 비슷한 점은 각각 어떤 게 있었나요? 눈에 바로 띄는 차이점부터 말씀드리자면 싱가포르는 한국보다 땅의 크기가 작고, 일 년 내내 여름이며,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과 달리 여러 인종이 한데 모여 삽니다. 문화적으로는, 제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라 그런지 특히 두 나라의 ‘식문화’가 많이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싱가포르의 음식은 여러 나라의 음식 문화가 많이 섞여 있고, 요리할 때 사용되는 식재료가 그만큼 다양하지만 한국에는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은 음식이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문화적으로 유사한 점은 유교사상입니다. 효를 중시하고 개인보다는 가족 중심으로 생활하는 모습이 닮았어요. 추석, 설날, 동지가 있는 것도 같답니다. 한국에서는 동지에 팥죽을 먹고, 싱가포르에서는 탕위안이라 불리는 경단을 먹는 정도의 차이를 제외하고요.(웃음)    싱가포르식 흑임자 , 피넛 경단                                            판단 케이크   Q.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힘들었던 점이 있었나요? 있었다면,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국어를 못하니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영어를 공용어처럼 쓰지만,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난관에 부딪힌 느낌이었죠. 또, 사업 비자를 받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신청 절차도 까다로울뿐더러 가게를 먼저 오픈한 후 법무부에 사업비자를 신청해야 하는데, 당시에 ‘외국인이 한국에서 외국인 법인을 세워 카페를 운영한 사례가 없어서 비자가 나올지 안 나올지 확신할 수 없다’는 담당자의 말은 지금도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정성껏 준비하여 매장을 오픈했는데 비자가 안 나오면 매장을 닫고 싱가포르로 돌아가야 했으니까요.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 스스로도 열심히 노력하고 주변 분들도 많이 도와주신 덕에 차근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Q. 코로나19 사태로 해외여행이 어려운 시기에 한국에서 싱가포르 현지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셰프님의 디저트가 더 특별한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면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으신가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새삼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아직 한국 사람들에게 싱가포르의 디저트와 음료는 낯설게 느껴지는 데다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선뜻 접근하기 어려워하시는 것을 느꼈거든요. 평상시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나라의 외국인 셰프와 음식이었으니까요. 언젠가는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싱가포르의 디저트를 부담 없이 경험하고 친근히 여길 수 있도록 온라인 판매를 시도할 예정입니다. Q. ‘아세안문화원’은 싱가포르를 포함한 아세안 10개국의 문화, 소식 등을 한국에 알리고 국가 간 소통하는 데 힘쓰고 있어요. 한국에 사는 싱가포르인으로서 아세안문화원에 바라는 점이 있을까요? 제 가게에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외국 손님들이 꾸준히 방문하십니다. 단순히 식사를 하는 자리가 아니라, 한국의 어느 지역에 가면 어떤 음식이 있고 맛은 어떠한지, 또 한국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생활 정보를 공유하는 만남의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지요. 만약 이런 ‘만남의 장소’를 아세안문화원에서 온라인 카페 형태로 만들어주신다면 한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외국인들이 소통하고 정보를 나누는 유익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응켕렝 셰프님 외에도 한국이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싱가포르 사람들, 또 아세안인들이 많습니다. 끝으로 이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의 언어와 음식 등 많은 것들이 모국에서의 문화와 달라 힘들겠지만, 어느 나라건 하루하루 성실히 생활하고 그곳의 모습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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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6

필리핀 출신 최초 귀화경찰관, 아나벨 카스트로 아나벨 카스트로   코로나19 관련 치안과 방역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 경찰관들, 필리핀 출신의 아나벨 카스트로 씨도 그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2008년 외국인 이주민이 많아 ‘국경 없는 마을’로 불리는 경기도 안산시에서 처음 경찰 제복을 입었습니다. 이후 10여 년이 훌쩍 지나 어느덧 경사로 근무하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안전은 물론, 다문화 가족들이 언어나 생활 문제로 겪는 어려움까지 두루 살피는 믿음직한 대한민국 경찰관, 아나벨 씨를 만나보았습니다.    Q. 안녕하세요, 아나벨 경사님. 월간 아세안문화원 독자들에게 간단한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경찰관으로 일하고 있는 아나벨 경사입니다. 23년 전, 모국 필리핀을 떠나 대한민국 전라남도 함평군에 있는 조용한 마을에 왔습니다.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을 꿈꾸며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후 착하고 예쁜 3남매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Q. 한국에서 경찰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와, 실제로 경찰관이 될 수 있었던 아나벨 경사님만의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부터 쭉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했어요. 그때는 경찰관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였지요. 한국어 교본을 달달 외우기도 하고, 일부러 문장이 직관적으로 쉽게 쓰인 동화책을 많이 읽었어요. 덕분에 실력이 빨리 늘어서 외국 여성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 봉사에도 참여했고, 함평경찰서에서 통역을 돕기도 했어요. 당시 통역 활동을 하면서 친해진 경사님 한 분이 ‘경찰 시험을 준비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경찰관이 되면 한국에서 사회 활동을 시작한 외국인들이 언어와 문화 차이로 겪는 문제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경찰시험을 준비했어요. 노하우 같은 건 따로 없었습니다.(웃음) 단지 오래전부터 한국어를 공부하고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등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찾아온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Q. 아나벨 경사님은 필리핀 최초의 귀화 경찰관이세요. 한국의 경찰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필리핀에 계신 가족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필리핀 가족들은 제가 경찰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힘든 일을 겪을까 봐 좋아하지도 않으셨고요. 저 역시 필리핀에서는 경찰관과는 다소 거리가 먼, 생물학 교사로 근무했었기 때문에 잘 적응할 있을지 염려되었습니다. 하지만 난생처음 타국 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스스로 결정한 일은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경찰관이 되었을 때도 앞으로 맡은 역할을 잘 해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금은 필리핀 가족들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응원해 주십니다.   Q. 경찰관이 된 후 겪은 일 중 가장 특별하거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정말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중 가장 특별한 기억은 필리핀으로 돌아간 미취학 아동을 찾은 일입니다. 안산에 있는 몇몇 초등학교에서 의무교육을 받아야 할 학령 아동이 등교하지 않자, 교육청에서 아동들의 소재파악을 요청했어요. 알고 보니 찾고 있는 아이들이 이미 이주여성(어머니)과 함께 필리핀으로 돌아가고 한국에 없는 상황이었죠. 담당 경찰관분들이 필리핀에 있는 아이들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고, 이후에 제가 투입되어 통역을 하며 아이들의 소재 파악을 도왔습니다. 필리핀은 섬이 아주 많고 지역마다 언어가 달라 사람을 찾는 게 힘들거든요. 소재 파악이 모두 끝난 후에 담당 경찰관분들께서 정말 고마워하셨고, 저도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가족들과 함께 Q. 아나벨 경사님이 생각하시기에 한국 경찰관과 필리핀 경찰관은 많이 다른가요? 업무 방식과 범위를 세세하게 살피면 필리핀과 한국 경찰관은 서로 다른 부분이 많을 거에요. 하지만 다른 점보다는, 전 세계 경찰관들은 모두 ‘본인 나라의 법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모든 경찰관들이 각 나라의 관습과 문화, 사회적 규범에 맞는 법을 지키는 데 힘쓰고 있죠. Q. 필리핀 가족분들이 한국에 놀러 오신 적 있나요? 작년에 부모님과 여동생이 K-POP을 무척 좋아하는 조카들을 데리고 한국에 방문했습니다. 다 함께 복요리를 먹었는데, 어머니가 필리핀에서는 독 때문에 먹기 힘든 복어를 한국에서는 맛있게 요리할 수 있는 게 너무나 신기하고 훌륭하다며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아! 덧붙여 제 조카들은 한국에 있는 동안 프라이드치킨에 푹 빠졌답니다. Q. 파출소에서 어떤 업무를 하고 계신가요? 원곡다문화파출소 소속인 다문화특별치안센터에서 근무하다가 지난 2월 초에 안산단원경찰서 선부2파출소로 발령받았습니다. 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후부터는 일반 지역 경찰관과 동일한 업무를 하고 있어요. 관내 주민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훌륭한 순찰팀원들과 손발 맞춰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Q.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힘든 일도 많을 텐데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아나벨 경사님만의 비결이 있을까요?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어떤 구름이라도 그 뒤쪽은 은빛으로 빛난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인데, 아무리 좋지 않은 상황이라도 그 속에 반드시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밝은 쪽으로 마음을 이끄는 편이에요. 특히,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원곡다문화파출소 소속 다문화특별치안센터에서 근무하던 시절 Q. 요즘 아나벨 경사님을 포함한 경찰관분들이 코로나19 사태로 평소보다 더 바쁘실 것 같습니다. 업무적으로 평소와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코로나19 격리센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돌발상황에 대비하여 동료들과 교대로 거점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또 항상 개인 방역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관공서를 방문하는 민원인 대부분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들어오지만, 현장 출동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저희 파출소 직원들은 하루종일 방역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Q. 경찰관으로서의 목표가 있나요? 건강하게 퇴직하는 것입니다. Q. 한 인터뷰에서 “다문화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솟는다”고 답변하실 만큼 다문화가정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신 것 같은데요. 다문화가정을 위해 진행 중인 활동이나,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일이 있으신가요? 제 도움이 필요한 다문화가족이 있다면 언제든지 전화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다문화가족들을 위한 가정폭력 예방 교육을 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Q. 아나벨 경사님 외에도 한국이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필리핀 사람들, 또 아세안인들이 많습니다. 끝으로 이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타국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여러 어려움이 있어요. 하지만 어떤 나라든 현지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다면 더 좋은 모습으로, 더 즐겁게 생활할 수 있어요. 새로운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고, 문화적으로 교류한다면 다 함께 발전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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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4

'소통'의 힘을 믿는 미얀마 친구, 윈라이(WIN HLAING) 윈라이  “소통을 통해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와 갈등을 예방할 수 있어요.” 윈라이 씨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합니다. 부평역전 외국인자율방범대의 초대대장으로 활동하고, 한국에서 미얀마 식당을 운영하는 윈라이 씨는 이제 미얀마보다 한국에서 산 날이 더 깁니다. 낯선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내력에는 타고난 활동력과 적응력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문화를 존중하고 타인과 소통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힘이 컸습니다. 앞으로도 한국 속 외국인을 위한, 또 외국인이 낯선 한국 사람을 위한 활동에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윈라이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월간 아세안문화원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윈라이라고 합니다. 제 고향은 미얀마의 문화도시라 불리는 만달레이입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그곳에서 부모님과 누나, 동생과 함께 지냈습니다. 요즘은 부평에서 조그만 미얀마식당과 여행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평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미얀마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데, 특히 제 가게는 미얀마 음식이 주메뉴이기 때문에 그리운 고향 음식을 먹거나 친구들과의 만남의 장소가 되곤 합니다.   부평역전 외국인자율방범대 초대대장으로 활동하는 모습 Q. ‘외국인자율방범대’로 활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외국인자율방범대는 어떤 활동이며, 윈라이 씨가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요? 저는 부평역전지구대와 함께하는 외국인자율방범대의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자율방범대는 지역민들과 미얀마 사람들 간 문화적 갈등을 해결하고 지역 안전을 위해 활동합니다. 문화적인 차이로 벌어진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릴게요. 예전에 한국 아주머니가 윗도리를 벗고 길에 나온 미얀마 친구 한 명을 보고 깜짝 놀라 신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날씨가 워낙 덥기 때문에 남자가 상의를 벗고 다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한국에서는 야외에서 옷을 벗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오해를 하신 것이었죠. 저는 미얀마 친구와 아주머니께 양국의 문화 차이를 자세히 설명했고, 원만히 해결되었답니다. Q. 오래전, ‘이주노동자방송국’에서 한국 뉴스를 미얀마어로 전달하는 ‘미얀마어 아나운서’로 활동하신 바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신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으신지요. 한국에 거주하는 많은 외국인들이 언어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한국에 살면서도 언어 장벽으로 인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곳에 사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한국의 사회, 정치, 문화 등 주요 뉴스들을 미얀마어로 번역해 전달하면 한국 사회에도 도움이 되고 미얀마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미얀마어 아나운서’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Q. 미얀마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을 만큼 좋았던 한국 문화가 있을까요? 반대로, 한국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미얀마의 좋은 문화는 어떤 것이 있나요? 선후배 사이에, 또한 웃어른과 아랫사람이 서로를 존경하는 한국 사람들의 태도를 미얀마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미얀마에서도 비슷한 문화가 있지만 한국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널리 알리고 싶은 미얀마의 좋은 문화로는 ‘인내심’을 꼽고 싶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어떤 일을 시작했을 때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마무리하는 것을 잘합니다.  이주노동자 방송국의 미얀마어 아나운서로 활동하던 시절 Q. 1993년 한국에 온 뒤, 27년간 한국에서 지내고 계세요. 그동안 외국인자율방범대, 이주노동자방송국 미얀마어 아나운서, 다문화 교육, 통번역가, 작가 등 한국에서 지내는 미얀마인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이중 가장 보람 있었거나 다시 한 번 참여하고 싶은 활동은 무엇이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가 했던 활동 모두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통번역가로 활동한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병원에 간 미얀마 친구가 언어 때문에 진료를 받기 어려워하거나, 직장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한국과 미얀마 사람들 사이에서 통역을 해주고 소통을 도왔던 일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요즘도 그런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Q. 3년 전,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아이와 아이 엄마 ‘파니(가명·인도네시아인)’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도움을 주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파니 씨와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들을 수 있을까요? 아내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착해서 애정이 갔고, 파니의 모성애가 각별해서 더욱 마음이 쓰였습니다. 아이들의 아빠에게는 화가 났습니다. 동물도 자기 자식은 보호하는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책임감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분통했고 어린아이들이 더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다행히 요즘 파니 씨네 가족들은 한 외국인 쉼터의 도움을 받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유치원에 다니는데, 가끔 저희 가게에 놀러 옵니다. 저희는 지금도 서로 도와가며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Q.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낯선 환경과 문화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 적응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또한 오랜 시간 한국인들과 조화를 이루며 생활하는 윈라이 씨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한국어를 몰라 난감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얼마나 머물든 간에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한국어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어를 알면 한국의 문화를 알게 될 것이고, 문화를 알면 한국 사람들과 즐겁게 생활할 수 있을 테니까요. 결심한 후부터는 한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했고, 점점 불편함이 사라지는 걸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한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웃음) Q. 윈라이 씨는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혹시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지금 식당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시아 전문 음식점을 운영해보고 싶습니다. 미얀마, 한국, 중국, 인도, 태국, 베트남 전통음식을 한곳에서 맛볼 수 있는 큰 식당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여러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한때를 나눌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구체적으로 계획해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아내와 함께    Q. ‘아세안문화원’은 말레이시아를 포함한 아세안 10개국의 문화, 소식 등을 한국에 알리고 국가 간 소통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한국에 사는 미얀마인으로서 아세안문화원에 바라는 점이 있을까요? 정말 좋은 일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으면 각 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앞으로도 아세안 국가와 한국 간 문화소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윈라이 씨 외에도 한국이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미얀마 사람들, 또 아세안인들이 많습니다. 끝으로 이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를 모르면 그 법을 따르고 싶어도 못 따르기 마련입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려면 한국어를, 중국에서 생활하려면 중국어를, 어디든 터를 잡고 살아갈 나라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익히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를 배우면 현지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쉽고 그곳의 문화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다른 문화를 존중하고 배우는 과정은 삶에 큰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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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5

[인터뷰] 전 세계를 누리는 코끼리 할아버지 - 유소프 가자 모드 유소프 빈 이스마일       유소프 가자 씨는 개성 있고 감각적인 코끼리 일러스트로 유명한 말레이시아의 동화작가입니다. 전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사람과 문화를 만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그는, 한글의 멋을 담은 그림책을 출판하는 등 한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어느 나라 건 아이들은 모두 솔직하고 순수해서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할 때면 세상 그 무엇보다 즐겁다는 코끼리 할아버지, 가자 작가님을 만나보았습니다. Q. 월간 아세안문화원 독자들에게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모드 유소프 빈 이스마일’이고, 흔히 ‘유소프 가자’로 불립니다. ‘가자’는 말레이어로 코끼리입니다. 저는 아내 자키야와 결혼해 3명의 자녀를 두었고, 이젠 7명의 손주를 둔 할아버지랍니다. 또한 미술가이며 아동 그림책의 글 작가이자 화가, 그리고 상담사이면서 강사입니다. 저는 대부분의 활동을 아이들과 함께하는데, 어린이들은 솔직하고 순수해서 저 역시 즐겁습니다. 어느 나라든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고 배우려는 의지도 강하지요. 아이들의 이런 순수한 마음은 제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Q. 최근에 해외여행을 다니며 맛본 음식과 그 음식에 대한 경험을 책으로 구상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국의 음식은 입맛에 어떠셨나요?  네. 여러 국가에서 맛본 음식과 경험을 살려 책을 내려고 준비 중입니다. 사실 한국에서 이슬람교도로서 할랄 음식을 찾는 것은 다소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친절한 도움 덕에 몇 가지 음식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 음식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제주도의 신선한 해산물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라 매콤한 한국식 라면도 맛있었습니다.    Q. 작가님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에서 자랐고 인도네시아의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한국의 남이섬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한 이후에 다양한 책을 출판했고, 지금은 아랍에미리트, 중국, 미국 등지에서 아이들과의 체험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국가를 오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여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28개국을 여행하기도 했고요. 첫 번째 해외여행은 1970년 자카르타 방문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캠핑을 좋아했고 자연과 여행을 즐겼는데 그 경험들이 지금까지도 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Q. 작가님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에서 자랐고 인도네시아의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한국의 남이섬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한 이후에 다양한 책을 출판했고, 지금은 아랍에미리트, 중국, 미국 등지에서 아이들과의 체험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국가를 오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여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28개국을 여행하기도 했고요. 첫 번째 해외여행은 1970년 자카르타 방문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캠핑을 좋아했고 자연과 여행을 즐겼는데 그 경험들이 지금까지도 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유소프 가자의 코끼리 일러스트  Q. ‘코끼리’를 사회 문제를 대변하는 존재로 사용하는 동시에 말레이시아 문화를 알리는 활동에서도 활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작가님이 코끼리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저는 트레이드 마크로 ‘코끼리’를 사용합니다. 코끼리는 ‘신사적인 거인(Gentle Giant)’으로 알려진 멋진 동물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코끼리를 친근하게 생각하지요. 덕분에 저는 처음 만나는 아이들과도 코끼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림을 그리며 쉽게 친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상업적인 이유로 말레이시아의 나무가 벌목되어, 많은 코끼리들이 살아갈 터전을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코끼리들의 위기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코끼리뿐만 아니라, 다른 동식물과 우리 자신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말레이시아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매개체로는 코끼리를 선택하셨는데, 한국과 여러 차례 교류하며 느낀 인상을 바탕으로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동물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재두루미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들은 습지의 풀밭, 습한 목초지와 넓은 계곡의 갈대밭에 서식하는 학의 일종입니다. 회색의 몸과 목, 핑크색 다리, 하얀 머리를 가졌으며 눈가 주변에는 붉은 피부가 개성 있게 드러나 있습니다. 동쪽에 사는 재두루미는 한반도를 가로질러 이동하고, 북한과 남한 사이의 비무장지대(DMZ) 가까이에서 월동하며 그곳을 이동 단계 지역으로 삼습니다. 이후로도 수백 마리의 재두루미가 그보다 멀리 이동하여, 월동 흑두루미들과 합류합니다. 저는 끊임없이 날아가는 재두루미의 모습에서 한국인이 가진 끈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Q. 지난해 아세안문화원에서 열린 행사에 아내 자키야 씨와 함께 참여하셨어요. 한국의 아이들에게 알려준 말레이시아 문화나 이야기 중 반응이 좋았던 내용은 무엇인가요? 또, 작가님께서 봤거나 들었던 한국의 문화 중 기억에 남는 게 있을까요?  말레이시아의 과자와 나시고랭, 그리고 제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등장할 때마다 아이들의 표정과 감정 표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한국의 문화 중에서는 ‘훈육’과 ‘깔끔함’을 존경합니다. 또 거리에 각종 갤러리와 공공 조형물이 있고, 예술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점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유소프 가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2019 알기쉬운 말레이시아 특별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    Q.남이섬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한 것이 한국과의 첫 인연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행사였나요?  20여 개국의 작가와 화가가 ‘평화 이야기 프로젝트(Peace Story)’를 쓰고 그리는 행사였습니다. 처음으로 초대받은 한국 행사였고, 이후 스무 번 넘게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Q. 『 내 공은 어디에?』, 『 집을 지어요 』, 『 코끼리랑 길찾기 』, 『 코끼리 동산 』 등 국내에서도 여러 작품을 출간하셨어요. 한국에서도 작가님의 그림책이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남이섬에서 만난 출판사와 함께 여러 번 한국 어린이를 위한 책 출판을 논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책이 호기심을 유발하면서도 재미있고 유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는데, 그런 노력이 아이들에게 와닿았다고 생각합니다.   Q. 특히, 『 코끼리가 수놓은 아름다운 한글 』은 한국의 이한상 작가님과 함께 제작하신 책으로 그 의미가 깊습니다. ‘한글’에 관한 그림책을 한국 작가와 함께 제작하겠다고 생각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앞서, 알파벳을 코끼리로 형상화한 그림책 『 ELEPHABET 』을 출판한 적 있습니다. 전부터 여러 국가의 고유한 언어를 소개하는 책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다음 순서로 ‘한글’을 떠올렸고 마침 한국의 이한상 작가님과 뜻이 맞았습니다.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두 사람이 이메일과 전화로 연락하며 협업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도전적인 일이었지만, 그만큼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Q. 만약 다음에도 한국 작가와 협업할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을 제작하고 싶으신가요?  어린이를 위한 동요, 시, 자장가를 만들고 싶습니다. 혹은 말레이시아와 한국의 문화적 교류를 담은 이야기나 여행에 관한 책도 좋을 것 같습니다.   Q. ‘아세안문화원’은 말레이시아를 포함한 아세안 10개국의 문화, 소식 등을 한국에 알리고 국가 간 소통하는 데 힘쓰고 있어요. 한국과 인연이 깊은 말레이시아 작가로서 아세안문화원에 바라는 점이 있을까요?  어린이 그림책 일러스트 전시회, 아세안 작가와 화가를 대상으로 하는 워크숍, 아세안 어린이를 위한 문화 공연을 마련해주신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끝으로, 작가님의 그림책을 사랑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저를 지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제게 따뜻한 영감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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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8

라오스 청년, 한국은 나에게 제2의 고향: 포통 사이티 보우사 라오스 문화 수업 (왼쪽 두 번째) 라오스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던 포통 씨는 5년 전 한국에 왔습니다. 학문과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오른 유학길. 학교에선 알고 싶었던 분야를 마음껏 공부하고 학교 밖 현장에선 라오스와 한국을 잇는 활동에 두 팔 걷고 나섰습니다. 어느덧 계명대학교 경영학 박사학위를 모두 마친 포통 씨는 본인이 선택한 길이 언제나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의 모든 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합니다.  Q. ‘한국의 어떤 점에 끌려 유학까지 결심하게 되었나요?  A. 어렸을 적부터 한국 영화를 자주 보면서 이곳의 문화에 관심이 생겼어요. 좀 더 커서는 한국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곤 했는데 세계적인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관광명소들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또, 짧은 시간 동안 큰 발전을 이뤄낸 한국에는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요.  Q. 6년 전엔 라오스의 공무원이었던 포통 씨가 처음 한국에 유학 가겠다고 말했을 때 가족들이 많이 놀랐을 것 같아요.  A. 처음엔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셨습니다. 한국어도 모르고 환경도 익숙하지 않을 텐데 그곳에 가서 어떻게 공부할 거냐고 걱정하셨지요. 게다가 유학 기간까지 길었으니 우려되셨을 겁니다.    Q. 라오스와 한국의 문화가 서로 닮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비슷하다고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A. 한국에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라오스 사람들도 대부분 매운맛을 즐깁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손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처럼 라오스의 사회생활에서도 그와 닮은 문화가 존재합니다.   Q. 반대로, 라오스와 한국이 문화나 환경적으로 서로 다른 부분도 있었을 텐데요. 불편하거나 힘들었던 점은 없었나요?  A. 한국과 라오스는 닮은 부분이 많은 만큼 서로 다른 부분도 많습니다. 우선 한국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지만 라오스에는 우기와 건기만 있습니다. 대개 덥고 비가 자주 오지요. ‘겨울’을 경험해본 적 없는 라오스 사람에게 한국의 겨울은 매우 춥고, 필요한 옷가지 수가 늘어나 불편을 겪기도 합니다. 게다가 한국어는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등과 달리 라오스어와 완전히 달라서 라오스 사람이 한국어를 배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Q. 포통 씨가 생각하는 라오스는 어떤 나라인가요?  A. 라오스에는 아주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각 민족은 자신들만의 특별하고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고 서로 존중하며 평화롭게 지냅니다. 다채로운 문화가 공존하는 라오스는 세계의 여러 문화에 관심이 많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보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천연자원도 풍부하고 국제적인 대기업들의 주 소비시장으로 부상하고 있어 무궁무진한 기회의 땅이기도 합니다.   글로벌 컵 2018 Q. 포통 씨는 한국-라오스친선협회의 부학생회장을 맡았고 한-아세안센터(ASEAN-Korea Center)에서는 멤버십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세안문화원의 ‘알기 쉬운 라오스’ 행사에도 참여했었고요. 이러한 활동을 시작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A. 제가 한국의 국제교류기관들이 주최하는 활동에 참여한 이유는 두 가지에요. 첫 번째는 한국문화와 한국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다양한 국제교류 전문가와 함께하는 현장 경험을 통해 학교에서는 얻기 힘든 값진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Q. 지금껏 라오스를 알리기 위한 여러 행사와 봉사 활동을 해왔는데요. 혹시 포통 씨가 직접 기획해보고 싶은 한국-라오스 친선 행사가 있을까요?  A. 대부분의 라오스인들은 한국에 대해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적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라오스 청년들을 한국에 초대하여 두 국가의 젊은이들이 서로의 문화를 경험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교류의 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양국 청년을 위한 우정 행사가 열리면 라오스와 한국이 좀 더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꿈을 안겨줄 좋은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요?   제1회 한·메콩 정상회담에서 (왼쪽 두 번째) Q. 포통 씨의 SNS에 서울, 부산, 대구, 제주도 등 아름다운 한국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가장 좋았던 장소는 어디인가요?  A. 저는 경복궁, 남산 타워, 남이섬, 창덕궁, 한라산, 우도, 주상절리 절벽 등 한국의 이곳저곳을 여행했습니다. 그중 가장 좋았던 곳은 제주도인데, 세 번이나 다시 다녀올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어요. 제주도는 풍경이 아름다운 데다 하늘이 깨끗하고 공기가 맑습니다. 주민들도 너무나 친절하고요. 외국인들이 살기에 정말 좋은 섬이란 생각이 듭니다.   Q. 곧 라오스로 돌아갈 예정이시라고요. 앞으로 라오스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실 건가요?  A. 라오스로 돌아가면 교수로 근무할 예정입니다. 한국에서 배운 경영학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고요.   Q. 다시 한국을 방문할 계획도 있나요?  A. 5년간 한국에 살면서 이곳의 문화와 먹거리 등 많은 부분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어요. 이제는 한국이  마치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제 ‘고향’이니 분명 언젠가 또다시 방문할 거예요.   Q. 아세안문화원의 여러 행사에 참여했던 만큼 문화원에 바라는 점이 있을까요?  A. 이미 아세안문화원은 한국과 아세안 관계를 긍정적으로 이끄는 다양한 활동들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아세안의 문화와 생활에 대해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아세안 국가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행사를 앞으로도 많이 열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Q. 끝으로, 포통 씨처럼 한국에 사는 라오스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A. 대한민국은 라오스만큼이나 아름답고 배울 게 많은 나라입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통해 많은 배움을 얻고, 라오스와 한국의 우정을 응원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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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의 아세안 6

센스와 노력으로 가꾼 한국 생활: 인도네시아에서 온 방송인, 김야니    딸과 함께, 김야니 (좌측) 재치 있는 입담과 명료한 한국어 발음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인도네시아 출신 방송인 김야니 씨는 한국에서 20년째 살고 있습니다. 특유의 통통 튀는 밝은 에너지와 꾸준한 노력으로 통역사를 거쳐 배우, 인플루언서, 그리고 엄마로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 방송에서 본 야니 씨는 정말 유쾌하신 것 같아요. 친화력 좋은 성격 덕에 낯선 타국에서도 수월하게 적응하신 것 같고요. 그런 성격은 타고나신 건가요?  A. 원래 활발한 성격이에요. 전 집에 있는 것보다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더 즐거워요. 남편은 저를 24시간 돌아다니는 여자라고 말할 정도예요.(웃음) 물론 집에 있을 때도 아이들이랑 활동적인 일을 하려고 해요.   Q. 이전에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여해 많은 상을 받았어요. 나중엔 이 재능을 살려 통역 일도 맡으셨고요. 한국어를 배우는 게 힘들진 않았나요?  A. 안 힘들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죠. 특히 제 경우엔 결혼이 아닌, 일을 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저를 도와줄 지원군(한국인 가족)이 따로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 회사에서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영어도 안 통하고 한국어도 안 통하고 난감했어요. 말이 안 통하니 보디랭귀지를 주로 사용했고, 상대의 표정과 억양으로 ‘아~ 이런 말이겠구나’ 어렴풋이 짐작해 소통했어요. 마치 퀴즈쇼를 하듯이요. 그러다 시간이 흘러가니 조금씩 알아듣는 단계가 오더라고요. 그때부터 3~4개월 정도 버티니 그제야 상대와 대화가 이어지기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완벽하려는 욕심을 버리면 시작을 할 수 있고, 시작하면 발전할 수 있어요.  Q. 한국 가족들은 인도네시아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나요? 야니 씨가 한국어 하시는 수준까지는 힘들 것 같아요.  A. 남편은 인도네시아 출장이 잦다 보니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할 수 있어요. 딸도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제가 한국어로 말하는 것만큼은 안되죠..(웃음)   Q. ‘한국생활을 하며 문화적인 차이로 힘들었던 적은 없다’고 하셨죠. 그래도 인도네시아와 이곳은 다른 부분이 많을 텐데 그런 부분을 어떻게 조율했는지 비결을 알 수 있을까요?  A. 제 원칙은 하나에요. 본인이 자리 잡은 곳의 문화를,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거예요. 꿈만 갖고 한국으로 온 인도네시아의 어린 친구들이 상상과 다른 환경에 힘들어하는 걸 종종 봤어요. 그 친구들에게 늘 해주는 얘기가,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서로 다른 문화를 지녔으니 처음엔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요. 저 역시 이곳에서 20년째 지내고 있지만 아직도 남편과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부딪히기도 해요. 다만 서로의 생각을 존중한다면, 한 발짝 더 다가서서 친밀해질 수 있다는 걸 이젠 알기 때문에 결국은 서로 합의점을 찾아낸답니다.  EBS 라디오 방송 ‘EBS 초급 인도네시아어’ 에 출연한 모습 Q. 야니 씨는 직업이 참 다양해요. 통역 일을 하신 적도 있다고요.  A. 부산에서 지낼 때 7년 정도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한국에 일하러 온 인도네시아인들과 그들이 속한 회사 사이의 중간다리 역할을 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은데 계약서 문제 때문에 발이 묶였거나 사내에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경우, 제가 통역을 하며 도왔죠.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인도네시아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근로 교육을 병행하면서요. 저는 좋은 것만 말해주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주로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좋아보이겠지만, 나 역시 20년 전엔 당신들과 같이 힘듦을 겪었다’고 알려줬어요.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없고, 남의 나라에 와서 큰 것부터 기대하는 게 오히려 공짜를 바라는 심보라고, 무엇이든지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해줍니다.  Q. 도움받았던 인도네시아분들이 참 많았을 것 같아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국산업인력공단의 통역 일을 해보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A. 지금은 배우로서 더 전념하고 싶어요.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에 온 이주 여성으로 20년간 살아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직업엔 언어능력에 따라 제한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이곳에 오면 한국어를 잘할 수 없으니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이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요. 이후에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 콜센터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일할 조건이 되고요. 그리고 누가 말을 걸어도 두려움 없이 자신감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또 다른 일을 해볼 수 있어요. 저는 이제 다른 일도 할 수 있으니, 지금 반드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어요.  Q. 앞으로는 방송활동에 집중하고 싶으신 거죠?  A. 네. 방송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보니 처음엔 ‘제안이 안 들어오면 어쩌지?’ 하고 고민했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즘은 꼭 TV 방송이 아닌, SNS로도 소통할 수 있더라고요. 혼자 1인 스튜디오도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아요. 되든 안 되든 일단 도전해보자는 마인드라 어제도 방송 프로그램 오디션을 보고 왔어요.  Q. ‘한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해 ‘연기 재능을 발견하게 해준 고마운 나라’로 애정 어리게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A. 촬영장에서 “언제부터 연기를 했어요? 학원을 다닌 거예요?”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한국에 와서 방송 활동을 처음 해봤고 무작정 시도해본 거에요. 당연히 처음엔 연기도 어색하고 잘 못했는데, 현장에서 선배들의 연기를 살펴보고 따라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한결 자연스러워졌어요. 이전에 해본 적 없던 일을, 한국에 와서 직접 해보고 제 재능을 발견한 거죠. 한국은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해준 고마운 나라예요.  Q. ‘일단 시도해본다’는 마음가짐이 지금의 야니 씨를 만들어준 것 같아요.  A. 욕심을 조절했어요. 대스타가 되기 위해 방송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회가 온다면 최선을 다했고, 시기가 맞지 않을 땐 다른 일을 했어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꾸준하게 이어가려는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경력을 쌓아갈 수 있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주시더라고요.   니콜라이 욘센과 함께, 김야니 (우측) Q.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인도네시아 분들이 많은데, 이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한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하고 이곳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인도네시아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환상만 가지곤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없습니다. 어디서든 힘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노력한다면 어느 나라에 가서도 잘해낼 수 있을 거예요.  Q. 마지막으로 아세안문화원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A. 아세안문화원에서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를 더 많은 분들께 알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직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거든요.(웃음)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하는 만큼, 한국 분들도 인도네시아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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