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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SPRING

자수로 이름표 새겨주는 체육사

체육사는 운동에 필요한 기구와 장비들을 파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 인근 체육사들은 그것만으로 수익을 내지 않는다. 학생들의 교복과 체육복에 자수로 이름을 새겨주는 일. 김일체육사 이경자 사장이 40년간 변함없이 해온 일이다. 재봉틀로 한 글자씩 이름을 새기면서, 그녀는 오늘도 기쁘게 손님들을 맞이한다.

이경자 씨는 지난 40년간 변함없이 오전에 체육사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린다. 학생이었던 손님이 엄마가 되어 아이 이름을 새기러 오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손님도, 정겨웠던 주변 풍경도 변했으나 변하지 않은 한가지는 그가 손수 새기는 이름 자수이다.


‘뚝딱’이란 말이 있다. 힘들이지 않고 일을 손쉽게 해치우는 모양을 나타낸다. 이경자 씨가 재봉틀로 이름을 새기는 데는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 뚝딱 일을 끝내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보낸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일자로 선을 긋는 일부터 시작해 한글까지 수없이 연습하며 가능해진 일이다.


변함없는 40년

김일체육사가 일 년 중 가장 바쁠 때는 매년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1~2월이다. 신입생들은 교복을 새로 맞춘 뒤 이곳을 방문해 입학 연도에 해당하는 컬러에 이름을 새긴 명찰을 단다.

이 씨의 손가락들은 한쪽으로 일제히 휘어있다. 이름을 새기며 살아온 40년 세월이 손에 오롯이 담겨있다.

“처음 재봉틀을 다룰 땐 손을 많이 다쳤어요. 지금은 손가락이며 손목 통증에 시달리고 있고요. 그래도 참 행복했던 것 같아요. 재봉틀을 돌리고 있으면 딴생각이 전혀 안 나거든요. 바쁠 땐 밥 먹는 것도 잊어요. 시간이 정말 빠르게 가요.”

그녀가 40년을 보낸 김일체육사는 경기도 김포시 북변동에 있다. 북변동은 과거 김포시의 중심가였던 곳이다. 1970년대 군청과 우체국이 들어서고 그 주변에 점포와 술집, 다방 등이 들어서면서 김포 최고의 번화가로 자리 잡았다. 그랬던 이 거리가 현재 재개발을 앞둔 상태다. 지금의 정겨운 풍경들이 몇 년 안에 흔적 없이 사라질 예정이다.

“이 동네가 철거되면 그때는 체육사를 그만두려고요. 지금은 한 달 월세가 오십만 원인데, 새 곳으로 가면 지금 보다 몇 배를 더 내야 할 거예요. 현재의 수입으로는 감당할 방법이 없어요. 이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몇 년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저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져요.”

자수로 이름표를 새겨주는 학교는 김포중학교, 김포여자중학교, 김포고등학교를 비롯해 김포시에 있는 약 20개의 중•고등학교다. 학교별로 학년별로 명찰 색이 다르다. 혹여 실수라도 할까 봐 해가 바뀌면 학교, 신입생, 재학생 등 각각의 명찰 색깔을 벽에 새로 써서 붙여두고 일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처럼, 색색의 이름표를 새기며 그녀는 묵묵히 새봄을 맞이한다.

손, 발, 무릎의 삼박자

김일체육사는 이 씨가 세 번째 주인이다. 첫 번째 주인은 이 씨의 고교 동창의 아버지였다. 김포 시가지가 형성되던 무렵에 문을 연 이곳을 고교 동창이 물려받아 운영했고, 1983년 그녀가 인수해 지금에 이르렀다.

“김일체육사가 ‘김포에서 제일가는 체육사’라는 의미더라고요. 뜻이 참 좋아서 상호를 그대로 쓰고 있어요.”

체육사는 운동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구와 장비를 파는 곳이다. 하지만 학교 인근 체육사들은 그것만으로 수익을 내지 않는다. 교복에 자수로 이름을 새겨주는 것이 꽤 중요한 수입원이다. 체육복을 팔 때 ‘서비스’로 이름을 새겨주다 교복에 다는 명찰까지 체육사의 몫이 된 것이다. 학교 교과에 교련(敎鍊 고등학교 이상의 학생들에게 실시된 군사 교육훈련 과목으로 대학 교련은 1988년에 폐지됐고, 고등학교 교련은 1997년부터 선택과목으로 바뀌어 사실상 폐지됐다)이 있던 시절에는 교련복에 이름을 새겨주는 것도 체육사의 일이었다. 교련복을 파는 곳이 체육사였기 때문이다.

“초창기엔 여기서 판매하는 교련복이며 체육복을 다른 가게로 가지고 가서 이름을 새겨왔어요. 자수를 할 줄 몰랐으니까요.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어서 장사하면서 틈틈이 연습했어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온종일 재봉틀과 함께했죠. 자신 있게 이름을 새기기까지 6~7년은 걸린 것 같아요. 재봉 자수는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발로 페달을 밟아 속도를 조절하고 무릎 리프트를 밀어 글씨 두께를 조율해야 해요. 삼박자가 맞아야 하기 때문에 오랜 숙련이 필요하죠.”

이경자 씨가 바늘귀에 실을 꿰는 건 아주 순식간이다. 시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실을 꿰는 감각이 손에 익은 덕분이다. 재봉틀로 새긴 그의 글씨체는 아름다운 궁서체다. 궁서체는 조선시대 궁녀들이 쓰던 한글 서체로 예의를 갖춰야 하는 문서에 주로 사용한다. 붓글씨에서 유래한 서체답게 자수로 새긴 그의 글씨도 여간 유려하지 않다. 무엇보다 세상에 하나뿐이다. 손으로 새기니 그럴 수밖에 없다. 명찰 한 개를 새겨주면 이천 원을 받는다. 어떤 이는 너무 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좀 비싸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저 웃으며 이름을 새길 뿐이다.

“4년 전에 우리 가게에도 컴퓨터자수 기기를 들여놨어요. 친동생이 컴퓨터 자수를, 제가 재봉 자수를 맡아 함께 작업해요.”

컴퓨터자수와 재봉자수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체온이 스미기라도 한 것처럼, 수동으로 새긴 것이 좀 더 따뜻하다. 재봉 자수를 찾는 고객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일체육사엔 학창 시절 이곳에서 명찰을 해간 이들이 아이 엄마가 되어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참 기분이 좋다. 한 자리를 오래 지키길 잘했다 싶어진다. 요샌 근처 유치원생 엄마들이 유치원복이며 수건에 이름을 새기러 올 때가 많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꼬마들인데도, 이름을 새기는 이 씨의 얼굴엔 늘 환한 미소가 돈다.

고향에서 나무처럼

매년 명찰을 새기다 보면 그 해 유행하는 이름을 알 수 있다.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네 글자 이름이나, 다섯 글자나 되는 긴 이름을 발견할 때도 있다. 손끝의 온기를 더해 이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담아 새기다 보면 하루가 지났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40년을 하다 보니 시대별로 어떤 이름이 유행하는지 알게 되더라고요. 한때는 한글 이름이 많더니 요샌 중성적인 이름이 많은 것 같아요. 부모의 성을 함께 쓰는 네 글자 이름도 새겨봤고, 한글로 된 다섯 글자 이름도 새겨봤어요. 돌아보니 다 재미있는 추억이네요.”

유행은 스포츠 물품에도 있다. 인기를 끄는 운동에 따라 잘 팔리는 물건이 그때그때 달라진다. 너른 들이 있는 김포는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마다 논을 얼려 아이들이 썰매며 스케이트를 타던 지역이다. 운영 초창기인 80년대 중반까진 그도 스케이트를 많이 팔았다. 겨울이 겨울답던 시절이었다. 롤러스케이트가 잘 나가던 때도 있었다. 무엇이 잘 팔리든, 아이들이 건강하게 놀 수 있는 물건을 판매한다는 게 그는 참 좋았다. 탁구 세트와 배드민턴 세트, 축구공, 농구공 등은 유행을 타지 않고 그럭저럭 팔리던 물품이지만, 최근엔 인터넷 판매에 밀려 판매실적이 매우 저조하다. 대신 옷에 패치를 붙이러 오는 사람이 많다. 집에서 바느질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구멍 난 겉옷에 패치를 붙여달라고 고객들이 찾아오면, 장미꽃이나 나뭇잎 같은 문양으로 바느질을 해 구멍을 메워드리곤 해요. 재질이 다른 패치를 옷감에 붙이는 것보다, 옷과 같은 색 실로 문양을 만들어 구멍을 메우는 게 더 잘 어울리거든요. 손님들이 좋아해 주셔서 저도 기분이 좋아요.”

이 동네엔 김일체육사 외에 체육사가 한 곳 더 있다. 김포체육사가 그곳이다. 거기서도 재봉 자수를 하지만, 두 곳은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협력하는 관계다. 체육복이 필요한 학생 수를 계산해 체육복을 반반씩 들여오고, 한 곳에서 먼저 다 팔면 다른 곳으로 안내하는 식이다. 서로 도와야 오래갈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이들도 동네 사람들과 함께 길렀다. 9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기 전 김일체육사는 김포시 유일의 영화관이던 우파레극장 자리에 세 들어있었다. 가게 안에 살림집을 들이고 거기서 두 아이를 길렀다. 이웃들이 수시로 아이들을 돌봐줬다. 일과 육아를 함께하느라 꽤 힘들었는데도, 온 동네에 온기가 가득하던 그 시절이 그녀는 무척 그립다.

“김포 양촌읍에서 태어나 김포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 나왔어요. 고등학교 선배와 결혼해서 여태 김포에 살고 있고요. 어릴 땐 이 주변이 다 논밭이었어요. 가을이면 벼가 노랗게 익은 들판이 정말 아름다웠죠. 도시가 형성되면서 옛 정취는 사라졌지만, 따뜻한 추억들이 내 가슴에 있어요. 생애 마지막까지 이 지역에서 살고 싶어요.”

이경자 씨는 올해 칠순을 맞는다. 태어난 자리에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나무처럼, 고향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칠십 년 인생이다. 그녀가 만든 나무 그늘 아래로 오늘도 하나 둘 손님이 찾아오면 이름을 새기며 이곳에 온기를 채워간다.

박미경(Park Mi-kyeong 朴美京)자유기고가(Freelance Writer)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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