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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클라라 가운(Maria Clara Gown)에 담긴 필리핀 전통 여성 복식 이야기

아세안 문화유산
마리아 클라라 가운(Maria Clara Gown)에 담긴
필리핀 전통 여성 복식 이야기
 
김미소(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마리아 클라라(Maria Clara)의 눈은 어머니처럼 커다랗고, 속눈썹이 검고 길었다. … 그 어린 소녀의 머리카락은 금발에 가까웠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코 덕분에 얼굴 옆선이 우아했 다. 작고 매력적인 입술이 그녀의 어머니를 연상케 했다. 피부는 양파처럼 고왔고, 면화처럼 희었다.” <호세 리살 지음·김동엽 옮김, 2010, 『나를 만지지 마라』, (서울: 눌민) 中 발췌>
마리아 클라라는 19세기 필리핀 민족주의 소설가인 호세 리살(Jośe Rizal)의 대표작품인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의 등장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이 소설에서 클라라는 스페인 식민 통치기 필리핀의 부유한 지주인 카피탄 티아고(Capitan Tiago)의 외동딸로 등장합니다. 클라라의 아름다운 외모는 소설 전반에 걸쳐 여러 차례 강조되었고, 그녀의 성품 또한 매우 사랑스럽고 기품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리잘의 소설이 필리핀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소설로 부각되면서 소설 속 가상 인물이었던 마리아 클라라는 필리핀인들에게 “아름답고 우아한 필리핀 여성”의 전형으로 여겨졌습니다.
필리핀 여성들의 전통 의상으로 알려진 마리아 클라라 가운(Maria Clara Gown)도 리살의 소설에 등장하는 그녀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메스티조 가운(Mestizo Gown)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스페인 식민지기에 유입된 스페인의 여성복과 필리핀의 전통적인 여성 복식인 바롯 사야(Barot Saya)를 결합해 만들어진 새로운 스타일의 복식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소설 속 마리아 클라라도 필리핀 메스티조였습니다.
 
필리핀 전통 여성 복식인 바롯 사야는 필리핀어로 블라우스를 뜻하는 바롯(Barot)과 스커트를 의미하는 사야(Saya)의 합성어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바롯 사야는 상·하의가 한 세트로 이루어진 앙상블(Ensemble)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롯은 필리핀의 열대 기후를 고려하여 긴 소매를 가진 블라우스로 만들어졌으며, 사야는 발목 정도의 길이의 통 넓은 스커트로 제작되었습니다. 특히 상의인 바롯은 필리핀의 전통적인 직물공예방식을 이용하여 파인애플에서 채취한 섬유로 만들어져 통풍성을 더했습니다. 스커트인 사야는 길이와 색감에 따라 스타일이 매우 다양한데, 전통적으로 필리핀 여성들에게 흰색과 검정색 혹은 검정색과 빨강색의 조합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바롯과 사야에 두 가지 복식이 추가되어 총 4벌이 한 세트로 구성됩니다. 추가된 두 벌은 파누엘로(Panuelo)라고 부르는 스카프와 타피스(Tapis)라고 하는 오버스커트(Overskirt)로 구성됩니다. 먼저 파누엘로는 스페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반영하고 있고, 마리아 클라라 가운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연원이 되었습니다. 파누엘로는 넓고 뻣뻣한 재질의 블라우스로 제작되며, 스카프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바롯 위에 마치 망토를 걸치듯이 파누엘로를 착의하고, 가슴 앞에서 브로치로 양쪽 스카프의 끝단을 고정시킵니다. 파누엘로의 크기가 클수록 화려함은 배가 됩니다. 타피스는 사야 위에 앞치마처럼 착의하며, 치마의 이음새와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는 기능을 했습니다.
필리핀 여성 사이에 유행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의 영향력은 19세기 필리핀 화가들의 작품과 20세기에 촬영된 사진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필리핀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Fine Art Manila) 소장 «La Bulaqueña»라는 제목의 유화는 19세기 필리핀의 화가이자 혁명주의자였던 주안 노비치오 루나(Juan Novicio Luna)가 남긴 작품입니다. 회화 속 여성이 입고 있는 복식은 전형적인 마리아 클라라 가운입니다. 넓은 소매 덕분에 통이 넓어진 바롯은 마치 날개와 같이 보이고, 그 위로 망토처럼 착의한 파누엘로가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필리핀민속박물관(Philippines Folklife Museum)에 소장된 회화에서도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착의하고 있는 필리핀 중년 여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화폭에 그려진 중년 여성의 복식은 마치 중세 유럽의 인물화에서 보이는 여성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특히 깔끔한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의 색상 대비, 묵주 목걸이는 가톨릭에 근거한 정숙한 여성상을 부각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본래 스페인 식민지 시기 동안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필리핀의 상류층 여성과 메스티조 여성들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착의하던 복식이었으나, 미국 식민지배기를 거치면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점차 필리피노 여성들의 전통적인 “패션(Fashion)”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필리핀 여성들이 공식적인 행사 혹은 웨딩드레스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착용한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미스 인터네셔널에 출전한 필리핀 대표가 전통 복식으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착의하고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마르코스(Marcos) 전 필리핀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 여사는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애용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이멜다 여사는 국가적 외교 행사시마다 여러 가지 스타일의 마리아 클라라 가운을 착의하고 등장했습니다. 그녀가 착의한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최고급 실크와 파인애플 섬유를 결합한 맞춤 드레스로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멜다의 영향력 덕분인지 오늘날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편의성을 갖춘 간편복으로도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국가적인 복식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클라라 가운은 스페인의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비롯되었으나, 이제는 명실상부 필리핀 여성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전통 의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는 호세 리살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존경과 함께, 소설 속 등장인물인 마리아 클라라에 대한 동경으로 만들어진 “전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