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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페라나칸(Peranakan) 뇨냐 패션(Nyonya Fashion)

아세안 문화유산
뇨냐(Nyonya)는 까숫 마넥(Kasut manek)을 신는다:
싱가포르의 페라나칸(Peranakan) 뇨냐 패션(Nyonya Fashion)
 
김미소(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싱가포르는 다양한 민족들의 공존을 통해 형성된 매력적인 혼성 문화를 가지고 있는 국가입니다. 싱가포르의 다채로운 문화 구성에 있어 페라나칸(Peranakan)은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페라나칸은 넓은 의미에서 15세기 이후 해상 무역을 위해 도서부 동남아시아 일대로 이주한 다양한 민족들과 현지인의 혼인 관계를 통해 태어난 후손들을 말합니다. 특히 싱가포르의 페라나칸은 남중국 출신 이주민과 현지의 말레이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다수이며, 이들에 의해 중국 문화와 말레이 문화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말레이어로 페라나칸 남성은 바바(Baba), 여성은 뇨냐(Nyonya)라고 불립니다.
페라나칸 문화를 설명할 때 “뇨냐 문화(Nyonya culture)”라는 범주가 있을 정도로 뇨냐들은 중국과 현지 문화의 특성을 융합한 페라나칸 문화의 형성 주체였습니다. 뇨냐 문화의 정수는 패션에서 잘 드러납니다. 뇨냐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여성 어른에게 자수, 구슬공예, 바느질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뇨냐 패션은 뇨냐의 손을 거쳐 탄생한 핸드 메이드였습니다. 뇨냐 패션에는 현지의 기후와 사정에 맞추어 변용된 독특한 디자인과 색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선명한 핑크, 하늘, 연두, 노랑색은 뇨냐들이 가장 선호했던 색채로 페라나칸 복식, 도자(porcelain), 자수용품(embroidery crafts)에서 자주 이러한 색상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까숫 마넥(Kasut manek)은 뇨냐 패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숫 마넥은 말레이어로 구슬을 의미하는 마넥(Manek)과 슬리퍼를 뜻하는 까숫(Kasut)이 합쳐진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 까숫 마넥은 작은 구슬들을 꿰어 만든 수제 슬리퍼를 말합니다. 본래 슬리퍼는 열대 기후 속에서 말레이인들이 신던 신발이었지만, 점차 페라나칸 뇨냐 패션으로 흡수되었습니다. 즉, 까숫 마넥은 말레이 문화의 바탕 위에 중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혼합되면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페라나칸 뇨냐들은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가족 행사를 위해 까숫 마넥을 직접 만들거나 주문 제작하였으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뇨냐의 일상 패션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까숫 마넥의 굽과 형태는 다양하지만, 선호된 색상이나 장식 패턴은 시대적 유행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주목할만한 특징은 발등을 덮는 슬리퍼의 표면 제작 기법과 장식 패턴이 시대에 따라 변화된다는 점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뇨냐들이 신던 슬리퍼는 주로 봉황이나 모란, 용, 화조, 기린 등 중국의 전통적인 길상문양 장식 패턴이 선호되었고, 발등을 덮는 표면도 주로 천 위에 여러 가지 색상의 실이나 구슬로 자수를 놓아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슬리퍼가 바로 싱가포르 페라나칸 박물관(Peranakan Museum)에 소장된 슬리퍼입니다<사진 1>. 여러 가지 색상의 천으로 화면을 분할하고, 그 안에 소형의 금색 구슬로 봉황과 기린, 구름 등의 장식 패턴을 꿰어내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사진 1> 까숫 마넥, 19세기 말~20세기 초, 페라나칸 박물관ⓒ
20세기 초에 제작된 까숫 마넥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구슬을 이용하여 슬리퍼 전면에 장식 패턴을 채워 넣는 기술적 발전이 엿보입니다. 또한 장미, 강아지, 앵무새, 작은 소녀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티프들이 장식 패턴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유럽에서 새롭게 유입된 문화적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싱가포르 아시아 문명 박물관(Asian Civilisations Museum)에 소장된 또 다른 두 점의 슬리퍼<사진 2~3>를 함께 살펴볼까요? 이전 시대의 슬리퍼와 비교해서 슬리퍼 표면을 여러 가지 색상의 구슬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장식 모티프도 서구의 예술적 취향을 반영한 동식물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 2> 장미 패턴의 까숫 마넥, 20세기 초, 아시아문명박물관ⓒ
<사진 3> 작은 소녀와 앵무새가 표현된 까숫 마넥, 20세기 초, 아시아문명박물관ⓒ
이 시기 까숫 마넥 제작에 사용된 다양한 색상의 구술들은 주로 유럽과 일본에서 수입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까숫 마넥의 장식 패턴에서 보이는 변화는 시대적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20세기 이후 까숫 마넥은 싱가포르의 뇨냐뿐만 아니라 현지에 거주하는 외국 여성들도 제작해 신을 정도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수요자의 취향을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장식 패턴과 제작 기법의 변화가 동반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땀 한 땀, 뇨냐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까숫 마넥에는 다양한 민족에 의해 형성된 싱가포르의 역사와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까숫 마넥은 싱가포르의 혼성 문화를 대표하는 페라나칸 유산(Peranakan legacy)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으로도 다량 제작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