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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속의 한국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 커피마스터의 향긋한 이야기 - 이진호
이진호
“당장은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제가 기대했던 결과가 안정적으로 이어지면, 그때는 다시 커피와 함께하고 싶어요.” 한국인 커피마스터 이진호 씨는 요즘 인도네시아의 봉제 회사에서 생산관리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치커피 붐이 일었던 2011년, 한국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그는 아시아의 최대 커피 생산국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주해 또 다른 커피 전문점을 열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커피와 사람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각별합니다. 언젠가 인도네시아의 향긋한 커피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진호 씨를 소개합니다.
Q. 아세안문화원 독자분들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인도네시아에 살고 있는 이진호라고 합니다. 2011년 9월 아내, 딸과 함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주했어요. 처음에는 북부 자카르타에서 더치커피와 초콜릿 전문점을 운영하였고, 현재는 인도네시아 중부 자와에 있는 봉제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Q.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생두 수출입과 커피전문점 사업을 위해 장기 출장 개념으로 자카르타에 왔어요. 그 후 외국인 허가법인 설립을 계획하고 인도네시아 지방 곳곳에 있는 여러 커피 농장을 왕래하면서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어요. 더치커피가 처음 시작된 자카르타의 옛 이름, ‘바타비아’에서 제가 가진 커피 기술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인도네시아에는 커피 사업 전 의류 벤더회사를 다닐 때 출장을 다녀온 경험이 있기도 했고, 학교선배가 살고 있기도 해서 다른 나라에 비해 낯설지 않았어요.
Q. 2000년대 후반, 홍대에서 ‘미즈모렌’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한국에 더치커피 붐을 처음 일으킨 장본인이세요. 많은 산업 중 ‘커피’ 산업에 종사하셨던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우연히 마셨던 더치커피에 완전히 매료되었거든요. 오래전 의류 벤더회사를 다니던 중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에 머문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셰프로 일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요리를 배우고, 외식업 운영방법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여러 프랜차이즈 매장을 방문하던 중이었어요. 우연히 들른 오사카의 한 커피 전문점에서 더치커피를 마셨는데 기막히게 맛있는 거예요. 몇 잔을 연달아 내리 마신 탓에 그날 밤 잠을 못 이뤘지만, 커피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고 ‘이거다!’ 싶었죠. 그때부터 식당에서 카페로 업종을 바꾸고 일본 나고야에서 커피 로스팅부터 추출까지 열심히 배웠습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홍대에서 8대의 콜드브루 커피 기구로 하루 30,000cc 정도 생산 가능한 더치커피 전문점을 오픈하게 되었죠.
Q. 인도네시아에서는 루왁커피가 워낙 유명하잖아요. 루왁커피 외에도 다양한 커피가 있을 것 같은데, 인도네시아 커피만의 매력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사향고양이가 커피체리를 먹고 배설한 씨앗을 말려 만드는 루왁커피는 소량만 생산되고 볶은 후에는 잔향이 오래 지속되어 인도네시아에서 유명한 커피 중 하나이긴 합니다. 하지만 커피 농장에 방문했다가 케이지 안에 한 마리씩 갇혀 익지도 않은 커피체리를 먹고 있는 사향고양이를 보게 된 후로는 커피 평가를 해야 하는 특별한 일 외에는 마시지 않게 되었어요. 루왁커피가 아니어도 인도네시아에는 재배되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 환경에 따라 다른 매력을 가진 커피들이 많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수마트라섬의 만델링과 아체, 린통과 플로레스, 토라자, 파푸아 커피가 있겠네요. 특히, ‘반둥’이라는 도시에는 인도네시아아에서 재배되는 대부분의 생두를 구매하여 원두만을 따로 판매하는 숍도 있답니다. 연중 선선한 반둥의 날씨를 활용하여 창고에서 생두를 3~5년간 숙성하고, 100년 된 독일제 장작 로스팅 기계로 볶아내죠. 덕분에 지역별 특성을 품은 원두들에 더욱 깊은 풍미가 생겨납니다.
한국은 경제가 발전하고 여가생활과 디저트 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과정에서 드립 커피와 에스프레소 커피 전문점이 대중화되었지만, 인도네시아는 아직까지 인스턴트커피가 더 인기 있습니다. 물론 원두커피를 마시기도 하지만 원두커피 본연의 맛보다는 설탕이나 향이 가미된 시럽을 넣어 마시는 걸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또, 차와 담배 경작지가 많아 커피와 차, 담배를 함께 즐기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인도네시아 커피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Q. 현재는 봉제 회사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커피에서 봉제 쪽으로 산업을 변경하신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가 가진 자본으로 커피 사업을 시작했지만, 로케이션 문제로 자카르타 북부지방에 오픈한 가게를 3년 만에 접게 되었습니다. 이후 현지인, 한국인과 동업하여 진행한 사업도 수익이 나지 않았고, 그때부터는 저만 보고 먼 곳까지 이주한 가족들을 위해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다행히 인도네시아에서 알고 지낸 교민분들의 도움으로 봉제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며 몸을 움직이고, 교류하고, 새롭게 무언갈 배운 덕분에 살아가는 원동력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Q. 현재는 커피 산업에 종사하진 않지만, 여전히 ‘커피마스터’로 불리는 커피 전문가세요. 요즘도 종종 가족들이나 동료들에게 직접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시곤 하나요?
네, 물론입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양국에서 동종업계분들이 인도네시아 커피에 관해 물어오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질문에 답변도 하고 커피도 함께 시음합니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직장동료에게 직접 내린 커피를 대접하거나 집에서 볶은 신선한 커피로 만든 드립백을 선물하곤 합니다. 커피 관련업에 종사하는 지인분들과는 커피를 마시며 생산지별 맛과 향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기도 합니다.
Q. 어떤 방식으로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지인이 전해준 책과 어학사이트에서 내려받은 인니어 MP3 파일로 매일 공부했고, 현지인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책으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현지인과 함께 웃고 떠들며 대화하고 공감하는 것이 언어를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Q. 올해로 9년째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셨어요.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느낀 인도네시아의 좋은 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또,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국의 장점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조급증을 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간혹 다혈질적인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자원과 먹을 것이 풍부한 나라여서 그런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국의 좋은 모습으로는 ‘하면 된다’ 정신이 떠오르네요. 한국 사람들의 끈기와 정신력은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해요.
Q.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사귄 인도네시아 친구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카페를 오픈하고 며칠 안 되었을 때, 근처 다른 가게에서 일하는 점주 ‘아리수노(Aurisuno)’가 찾아왔어요. 그 친구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백반 정식인 ‘빠당(Padang)’을 팔고 있었는데, 저희 가게 커피에 관심이 많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졌습니다. 아리수노가 저에게 인도네시아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 알려주면, 저는 커피와 한국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인도네시아 NET TV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게 된 일이 있었는데, 아리수노가 저와 PD분 사이에서 통역을 도와주기도 했지요. 연말이면 항상 가족과 함께 먹으라며 케이크를 가져다주는 마음씨 좋은 친구입니다.
Q.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며 겪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처음 자카르타 북부에 카페를 오픈할 때부터 지금껏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는 이성우 씨와의 에피소드가 여럿 기억납니다. 인기밴드 ‘노브레인’의 보컬인 이성우 씨는 많은 교민들을 초청해 카페 오픈 기념 미니 콘서트를 열어주었으며, 자카르타 축구경기장에서 열린 초대형 SM 콘서트에 초대해주어 함께 일하는 현지 직원들과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자카르타 한국국제학교 교장 선생님과 교직원분들, 그리고 한-인도네시아 문화원생을 대상으로 커피, 와인 교육을 했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쇼콜라티에인 와이프의 도움으로 초콜릿 교육도 함께 진행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Q.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당장은 지금 하고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2천 명 이상의 직원이 있는 봉제공장에서 생산관리직을 맡았는데, 직원들에게 효율적인 작업방법을 알려주고 좀 더 체계적인 공정으로 관리하여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제가 기대했던 결과가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한다면, 그때는 다시 커피와 함께하고 싶어요. 장기적으로는 인도네시아 여러 섬의 커피 농장에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커피·카카오 농장투어와 카페운영 사업도 계획 중입니다. 인도네시아 대자연에서 느낀 편안함과 커피, 그리고 초콜릿이 직접 만들어지는 과정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답니다.
Q. 인도네시아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습니다. 끝으로 이분들에게 격려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 한 기사가 마음을 울렸습니다. 50년 전, 한국에서 평화봉사단 활동을 했던 미국인 ‘산드라 네이슨’ 씨가 한국의 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 코로나19 생존키트와 비단부채 등이 담긴 선물상자를 소포로 받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과거 어려운 시기 한국을 찾아 도움을 주었던 이에게 한국이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한 것이죠. 저도 지금 함께 일하는 인도네시아 동료분들이 먼 훗날 한국과 저를 좋은 기억으로 떠올릴 수 있도록 더욱 진심을 담아 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고, 2주 자가격리 기간 때문에 휴가를 받아도 한국에 가지 못하는 요즘 같은 시기는 모두 처음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해줄 수 있는 나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자긍심으로, 우리 함께 힘들고 어려운 해외생활을 잘 이겨냅시다. 우리를 관통해 지나가는 모든 시간은 훗날 돌이켜보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거름일 테니, 지금 머물고 계신 그곳에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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