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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 문학 세계에 알리는 안톤 허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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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세계에 알리는 안톤 허 번역가


1. 지난 3월 노벨 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 후보에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가, 1차 후보에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올라 화제가 됐습니다. 모두 번역가님이 번역한 작품들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문학 번역일을 해오면서 느낀 것은 외국인이나 교포가 아닌 순수 한국인이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에 대해 국내 번역 진흥 기관들, 국내 출판사들, 그리고 해외 출판 관계자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번역한 작품들이 부커상 후보로 발표된 이후로 이러한 편견이 많이 만회되는 걸 느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세계적인 위상을 지닌 상의 힘이겠지요. 저는 평생 번역을 해왔고 실력 향상과 더불어 해외 출판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지속적으로 힘써왔습니다. 큰 상의 후보로 지명됐다고 해서 제가 변한 것은 없습니다. 갑자기 없던 실력이 마법처럼 생기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것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2. 올해 1차 후보작 13편 중 두 편의 번역 작품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번역가이기도 합니다. 번역가로 활동하시면서 이런 큰 성과를 낸 비결은 무엇인가요?

저는 20년 넘게 번역을 해왔습니다. 오랫동안 책을 읽고,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번역일과 통역일을 했습니다. 출판 번역을 6년간 했고, 문학 번역을 전업으로 한 지 5년이 됐습니다. 2010년에 문학 번역 수업을 시작했으니 여기까지 오는 데 12년이 걸린 셈이죠. 12년이면 전문의, 박사가 될 수 있는 기간인 만큼 따로 비결은 없습니다. 굳이 꼽는다면 시간과 노력이 비결이라고 할 수 있겠죠. 세상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번역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요즘은 조기 유학 출신, 교포 번역가도 많아서 이러한 재능은 아주 흔한 것이 됐습니다. 하지만 문학 번역가가 되기 위한 노력, 시간, 기회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재능은 흔하고 노력은 귀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겠죠.


3. ‘저주 토끼’는 장르 소설이고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소설입니다. 장르도, 독자층도, 국내 인지도도 전혀 다른 두 작품을 어떻게 번역하게 됐나요?

훌륭한 번역가가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독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데 의외로 문학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문학 번역가가 되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 문학을 읽지 않으면서 한국 문학 번역가가 될 수는 없겠죠. ‘저주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은 매우 다른 책이고, 번역하게 된 이유도 다르지만 공통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정보라 작가와 박상영 작가가 글을 무척 잘 쓴다는 것입니다. 실은 궁극적으로는 두 분의 문체에 끌려 번역하게 됐습니다. 두 작가 모두 글을 너무 재미있게 쓰시는 분들이라 문체의 예술성이 평론이나 담론에서 가려지는 것 같아요. 특히 정보라 작가의 경우 등단 작가가 아닌 장르 문학 작가라는 편견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4. 번역 작업을 할 때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화자의 목소리입니다. 출발어 작가, 비슷한 도착어 작가, 그리고 제 스스로의 목소리를 알맞게 섞어야 신빙성 있는 화자가 다른 언어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이는 도착어 문학을 많이, 넓게 읽은 번역가만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최대한 많은 책을 읽으려고 해요. 영문학 작품만 아니라 영어로 번역된 번역서도요. 다른 번역가들이 비슷한 문체를 어떻게 풀었는지 엿본다는 생각으로요. 물론 정보라 작가의 작품을 읽었을 때처럼 바로 영어로 들리는 문체도 있긴 합니다.


5. 번역가로서 번역할 작품을 고르고, 국내 출판사로부터 번역권을 따내고, 번역 이후엔 현지 에이전시와 출판사에 작품을 소개하고 이후 홍보하는 역할까지 모두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번역가로서 가장 큰 애로사항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하면, 이러한 모든 과정을 금전적 보상 없이 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미국 드라마 ‘매드 맨’에 나오는 대사가 있어요. ‘일을 하는 건 쉬운데 그 일을 따는 건 어렵다’고요. 제가 번역한 책, 화려한 시상식 참가 뒤에는 수백 시간 한국 문학 신간을 읽으며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는 일, 작가를 설득하고 저작권자인 한국 출판사를 설득하고, 샘플과 제안서 제작을 하고, 도착어 시장 네트워킹을 하고, 해외 출판사에 샘플을 마케팅하는 굉장히 복잡하고 지루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전문 문학 번역가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죠. 아울러 한국 저작권자들이 번역가에게 조금 더 예의를 갖추고 대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한국 출판계에 계신 대다수가 좋은 분들이지만, 가끔은 황당한 경험을 할 때가 있거든요. 그럼에도 계속 이 일을 하는 걸 보면 제가 문학을 정말 좋아하긴 하나 봐요.


6. 한국 문학이 가진 매력은 무엇일까요?

저는 한국 문학이나 한국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국 문학이 다른 나라 문학에 비해 뭔가 특별하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국수주의에 불과해요. 의미 있고 아름다운 문학은 국경을 초월합니다. 그런 문학이 우리나라에도 있는 것은 당연하고요. 아무리 변방이라도 그런 문학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단지 여러 이유로 번역이나 유포가 안 되고 있을 뿐이죠. 한국은 그에 비해 조금 더 운이 좋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7. 현재 번역 중인 작품, 혹은 앞으로 번역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내년에 신경숙, 듀나, 이성복 작가의 책을 영어로 출간합니다. 이렇게 나열하니까 제가 정말 다양한 문학을 번역하고 있다는 게 실감나네요. 하지만 세 분 모두 제가 너무나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라 이 분들의 작품을 생각하고, 번역하고 있으면 설레고 행복해요. 이런 맛으로 문학 번역을 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