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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와 성찰을 안겨준 대한민국

한국전 발발 70년, 참전국 특집기사​ 

긍지와 성찰을 안겨준 대한민국​ 

 

​글: 허경은 작가 (『우리는 낯선 곳에 놓일 필요가 있다』 저자)

 

< 사진 1 >경기 고양시에 있는 필리핀군참전기념비

 

“오늘 우리는 우리 역사에 위대한 한 페이지를 씁니다. 이 땅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 온 여러분이 이제는 이국땅으로 나가 그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0년 전인 1950년 9월 5일, 필리핀 마닐라의 리잘 메모리얼 스타디움(The Rizal Memorial Stadium)에 울려퍼진 엘피디오 퀴리노(Elpidio Quirino) 대통령의 연설이다. 이날 현장에서는 6·25전쟁 참전을 앞둔 필리핀군의 파병식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필리핀은 오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1946년)을 이룬지 얼마 안 된 신생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해외 파병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독립이라는 비슷한 역사를 걸어온 한국이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돕고 UN 회원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꺼이 참전국에 이름을 올렸다. 필리핀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보내온 나라이자 전투 부대를 파병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로 기록됐다. 

 

   파병식 당시 퀴리노 대통령은 군인들 앞에서 “여러분은 그들(한국)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그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며 그럴 의지와 힘이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한반도 땅을 밟은 필리핀군 7,420명(112명 전사, 299명 부상, 16명 실종)은 그 결의와 약속을 지켜냈다.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말했던 한국의 재건과 놀라운 발전상이 이를 증명한다. 

 

   필리핀이 한국전 참전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들의 지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각 국가들의 지폐에는 자국의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 유적, 상징들의 그림이 담기기 마련인데 필리핀 지폐에 한국전 참전과 관련한 그림들이 담겨있었다는 점이 매우 인상 깊다. 

 

 

 

< 사진 2 >필리핀 500페소 구권 속 종군기자
‘베니그노 아키노’의 초상

   지난 2015년까지 유통되었던 500페소짜리 구권에는 종군기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베니그노 아키노(Benigno Aquino) 전 필리핀 상원의원의 초상과 그가 기고한 ‘제1 기병사단 38선 돌파(1st Cav knives through 38)’라는 제목의 기사, 그리고 필리핀 군인에게 꽃을 파는 한국인 여자와 어린 소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준 지원군으로서의 필리핀군과 폐허 속에서 도움을 호소하던 한국 피난민들의 참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필리핀 사람들은 아마도 일상생활 속에서 이 지폐를 꺼낼 때마다 자연스럽게 자긍심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이 지폐를 볼 수 없다. 새로운 도안의 신권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인데, 한국전 참전 모습을 담은 구권의 탄생과 폐기는 그 자체만으로 필리핀이 생각하는 한국전쟁 참전의 의미와 이제는 달라진 국력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은 해가 벌써 절반을 지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다. 해마다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다녀오던 지인도 올해만큼은 코로나19 팬데믹 아래 활동을 멈추고 내년을 기약 중이다. 지난해에 낙후된 지역을 재건하고 주민들을 돕고자 필리핀의 한 오지마을을 다녀온 지인이 다음에는 함께 다녀오자고 말해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던 터라 아쉬움이 더욱 크다. 

 

   1950년 9월, 마닐라에 울려 퍼진 연설을 거꾸로 곱씹어본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필리핀)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그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지금, 그들에 대한 감사와 애잔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몇 해 전 출장으로 마닐라를 방문 중일 때 들었던 ‘한국이 좋다. 당신이 부럽다’는 말을 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그들에게 자부심이자 본보기이며, 한편으론 성찰의 기회를 안겨 주는 국가로 인식되는 듯하다.

 

 

※기고문의 내용은 월간 아세안문화원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